(설교열기)(논지)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때로 화가 나는 일에 격분할 수 있죠.
그런데 그 격분의 주체가 나 자신이 되면 그것은 결코 성령님께서 기뻐하실 리 없죠.
내 자존심이나 체면이 깎이면 격분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속 품고 있으면 성령을 모신 성전으로 살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 격분의 주체가 내가 아닌 성령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불의를 보거나, 이방 신전을 보거나, 굿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런 모습 앞에 격분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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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격분한다고 해서 내가 이방 신전을 부수거나 굿판을 망가뜨릴 순 없겠죠.
그렇게 했다가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처발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불의를 보거나 이방 신전을 보거나 굿판을 볼 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그런 것을 좇아 살지 말도록,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죠.
(성화)이것은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을 살면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모습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도 공생애 시작할 때도 그랬고, 마지막 3년째에도 그렇게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전은 양이나 소나 염소와 같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태워드리는 곳이죠.
그런 번제물을 잡기 전에, 자기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그 짐승에게 죄를 전가시켜서, 그 짐승으로 대속을 받는 게 성전제사였죠.
그런데 그와 같은 거룩한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든 이들이 있었죠.
대제사장과 관련된 성전 관계자들인데, 그들은 멀리서 가져 온 짐승은 받지 않고 자신들이 준비한 짐승을 고가로 사게 했죠.
더욱이 성전과 관련된 화폐가 있어서 그것으로 환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번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그 성전이 도적의 소굴, 곧 환전상들의 장사판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죠.
그런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1장 15-17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깨달음) 어쩌면 그때 예수님께서도 격분하여 화를 내지 않았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기도해야 할 성전이 오히려 강도의 소굴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상과 의자를 엎어버리면서, 소리쳤던 것이죠.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단순히 그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 강도의 소굴로 돌변했기 때문입니까?
그 너머에 많은 백성들이 성전을 우상시하며, 성전에서 나와 제사드리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만큼 일반 백성들 속에 자리잡은 마음, 곧 하나님보다도 성전만을 숭배하려는 그릇된 마음을 바로 잡고자 한 것이었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주일날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는 우리가 걸어다니는 성전이죠.
구약의 짐승을 잡아 드리던 속죄물은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짊어지고 죽으셨고, 우리 시대에는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시대죠.
그래서 바울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말했죠.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내가 바라보는 것들 앞에 탄식하거나 격분한 적이 있습니까?
내 자존심이 꺾이거나 내 체면을 누군가 짓밟을 때는 격분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을 좇지 못하는 나의 모습 앞에 성령님께서 격분하신 적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의 사람이기에, 우리가 어긋난 죄를 좇아 가거나 내 안의 우상을 좇아 살 때, 그때 격분하시는 것은 정상이죠.
그것이야말로 아직도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베뢰아로 옮겨왔죠.
베뢰아로 온 바울은 곧바로 유대인 회당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복음을 전해 들은 이방인들 곧 헬라인과 귀부인들은 그 복음에 더욱 갈급하여 구약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했죠.
그만큼 그들의 심령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에 이전에 바울이 쫓겨났던 데살로니가에게까지 전해졌는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왔죠.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어떤 자들인지 이미 겪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고라의 폭력배를 동원해, 바울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한 야손과 몇몇 동료들을 통치자들에게 끌고 가 협박을 했죠.
그때 야손과 몇 몇 사람들은 다시는 바울을 만나지 않겠다고, 바울의 은신처를 알면 알려주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죠.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몇 몇 동료들에 의해 바울이 그 날 밤에 데살로니가를 빠져 나와 베뢰아까지 온 것이었죠.
그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곳의 이방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좋은데, 또다시 난동의 피해를 볼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그곳을 떠나기로 하죠.
그때 베뢰아의 몇 몇 동료들은 배편을 마련해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아덴에 도착하여 바울을 내려주고 그들은 돌아갔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 베뢰아에 놔 둔 채 홀로 아덴으로 떠났죠.
왜냐하면 베뢰아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초신자들, 또 데살로니가나 빌립보의 초신자들의 믿음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유대인들이 난동을 피우는 일로 곳곳의 초신자들이 신앙심을 잃어버릴까, 싶어,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북돋아 주도록,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둔 채 홀로 아덴에 온 것이었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바울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게 해 주는 말씀이죠.
자기 자신도 지금 홀로 아덴을 가는 상황에 어떤 일을 만날지 두려운 마당인데, 자기 자신보다 초신자들을 배려하는 바울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깃들어 있기를 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를 전도해서 나오거나, 누군가 나왔을 때, 그 사람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돕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모습 말입니다.
나에게도 다급하고 때로는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을지라도, 나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 그런 새신자를 배려하는 마음 말이죠.
(본문)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원해) 바울이 아덴, 지금의 아테네를 말하는데, 그곳에 왔을 때 그 성을 둘러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고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격분하다’는 헬라어 ‘파록쉬노우’(παροξύνω)는 ‘자극하다’(to stimulate) ‘진노하다’(provoke) ‘화가 일다’(arouse to anger)는 뜻입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까?
아덴, 곧 그 아테네 온 성에 가득한 우상 단지들 때문이죠.
(역배)본래 아테네는 그리스 신화에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서 유래된 도시입니다.
아테나 여신을 수호신으로 삼은 도시라는 뜻이죠.
바울이 2천 년 전 아테나를 방문할 때 그곳 아테네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도시였습니다.
예전에는 그곳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국가에서 맹주 역할을 했는데, 바울이 방문할 때는 전성기가 사라진 때였죠.
하지만 그곳 아테네는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레스의 본고장입니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역사〉라는 책을 집필한 헤로도토스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도 그곳 출신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테네는 연극의 발상지입니다.
3대 비극 시인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비롯해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도 활동한 무대가 그곳입니다.
더욱이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을 설계한 건축가 익티노스도, 파르테논 신전과 제우스 신전을 조각한 페이디아스도 아테네 시민이었죠.
비록 아테네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정치적인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문학과 철학과 예술의 명성은 여전히 살아 있는 곳이었죠.
그런 아테네에 바울이 도착했을 때 맨 먼저 무엇이 눈에 들어왔겠습니까?
저 멀리 우뚝 소아 오른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여신을 위해 만든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겠죠.
지금은 전쟁의 화약고와 지진으로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 들보만 남아 있는 상태죠.
하지만 2천년 전에는 직경 1.9m에 높이 10.4m에 달하는 기둥이 46개나 자리잡고 있는 엄청난 위용과 장엄을 지닌 신전이었죠.
그런데 그곳 아테네에는 그 장엄하고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 외에 프로필라이아, 아테나니케 신전, 아테나 여신 옥조각상,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테나 제단이 있었죠.
아클로폴리스 남쪽 기슭에는 1만 7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극장이 웅대하게 자리잡고 있었죠.
또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동남쪽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제우스 신전의 기둥만 무려 104개였는데, 그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 제우스 신전이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까?
바로 그와 같은 곳곳의 신전과 제단을 보고 바울이 격분했던 것입니다.
왜 이곳 아테네 사람들은 이런 신전과 제단 앞에 제물을 바치고 절을 하고 제사를 올리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때의 격분을 바울 개인의 격분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 속에 임해 계시는 성령님의 격분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성전에 장사치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 격분하신 것과 같은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였던 것이죠.
(나예)만약 저와 여러분들이 봤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시골 촌놈인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서울에 가서 63빌딩을 봤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데 맨 꼭대기에서 아래를 보니까 사람이 개미처럼 보였죠.
그리고 그곳의 아이맥스 영화관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데, 밀림의 인디언이 창을 던지는 장면이 연출됐죠.
그때 그 창이 관객인 우리에게 날라오는데, 그 모습 앞에 한 꼬마가 ‘응아’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정도로 아이맥스 영화관이 실제적인 모습을 연출하기에 충분했던 것이죠.
지금은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 당시 저도 이렇게나 큰 영화관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적용)바울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왜 격분했는지, 성령님의 격분에 왜 바울도 의로운 분노를 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성령님은 그 웅장하고 거대한 신전과 제단을 바라보는 바울의 심령 속에 말씀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아 네가 바라보는 이 신전과 제단 앞에 네가 압도당하고 있느냐?”
“바울아, 네가 바라보는 이 신전과 제단이 크냐 갈릴리 나사렛 예수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크신 분이냐?”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성령님께서 바울의 심령 속에 격분하셨던 것이고, 바울도 그에 따라 의로운 분노를 냈던 것 아니겠습니까?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우리의 심령이 주님 이외의 것에 압도당하는 모습 앞에 격분하시면서 우리를 바르게 세워주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혹시 2천년 전 아테네의 한 시민이었다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제단의 위용 앞에 압도당하지 않았겠느냐?”
“너도 혹시 2천년 전 성전의 대제사장과 관련된 사람이었다면 그들처럼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데 기여하지 않았겠느냐?”
“아무리 이 세상의 건물이나 우상의 신전이 거대하다 해도, 불상과 석탑이 위대해보여도, 그것이 주님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바로 그런 모습처럼 너도 이 세상의 크고 화려하고 압도당하는 것 앞에 주눅든다면, 네 심령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격분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네 마음 속의 우상으로 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그 우상이 신전이나 제단만이 아니라 네가 꿈꾸는 것 자체가 하나님보다 소중하다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네가 그것들에게 눈이 팔리고, 네 마음이 쏠린다면, 어찌 네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격분하지 않겠느냐?”
“너도 성령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우상으로 삼고자 할 때, 기꺼이 그 마음을 비워내고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물리치도록 해라.”
“우리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
(찬양)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발췌)오 할레스비의 〈영의 인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농부가 커다랗고 아름다운 배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해마다 수확하는 열매의 양이 줄어들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도 열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 한 참이나 고민을 했죠.
그때 그 농부의 집을 방문한 친구가 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줬습니다.
“여보게. 나무 몸통에서 좀 떨어진 곳을 둥글고 깊게 파 보게나.”
“그런 다음에 나무 아래쪽을 파서 큰 뿌리들을 모두 잘라내는 게 좋겠어.”
“왜냐하면 그 뿌리들이 양분이 별로 없는 하층토까지 너무 깊이 내려가 버렸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농부는 자기 친구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질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나무가 죽어버릴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미 나무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상태라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과연 그 친구의 충고대로 했을 때,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나무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것들이 그 친구가 예견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농부는 그 후에 아주 달콤하고 풍성한 열매로 보상받은 것이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의 심령 속에 주님 한 분만으로, 오직 말씀과 기도로 뿌리내리고 있어야 할 부분에 다른 우상의 뿌리들이 너무 많이 뿌리내려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죠.
그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애야, 네 심령 속에 잡다한 우상의 뿌리들이 주륵주륵 내려 있지 않느냐?”
“내가 그 모습을 보노라면 격분할 것 같은데, 하나씩 하나씩 잘라내야 하지 않겠느냐?”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그와 같은 음성을 듣고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실은 마음 속에 너무나 많은 우상의 뿌리들을 두고 있어요.”
“주님, 저를 너무 잘 알고 계시죠?”
“그런 우상의 뿌리들이 깊숙이 박혀 있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어요.”
“주님, 제 심령을 정결케 해 주시고, 제 우상의 뿌리들을 다 뽑아내고, 오직 주님만 제 마음 속에 주인으로 자리잡아주세요.”
“아테네 사람들이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네 제단과 같이 온갖 우상들을 섬길 때, 바울의 심령 속에 계신 성령님이 격분하셨어요.”
“주님, 저도 이 세상의 크고 위용이 있는 것들 앞에 주눅이 들고 그것을 흠모하고 바라볼 때도 있지만, 그때 제 마음 속에 격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하게 해 주세요.”
“오늘부터라도 제 마음 속에 우상의 뿌리들이 깊숙이 뿌리내린 게 있다면 하나씩 뽑아내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진리와 생명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요, 주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우상으로 자리잡을 수 없는 성전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들어갔을 때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네의 수많은 제단을 보고 격분한 것은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이 격분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시대에도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내 심령을 자극하고 내 심령에 우상으로 자리잡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들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성전된 우리가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뿌리내리고 있다면 기꺼이 잘라내고 말씀과 기도로 더욱 뿌리내리길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