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1-22)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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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에베소서 2장의 전반부를 통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이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또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밝혀줬습니다.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삶, 곧 세상 풍조를 쫓는 삶, 육체의 욕심을 따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마귀 곧 사탄의 지배력 속에 있는 삶이라고 했죠. 그것은 소아시아의 7교회의 성도들도 다르지 않는 것이었죠. 주님을 모르기 전 우리도 그런 삶이었죠. 그러나,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들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긍휼의 은혜, 자비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그 은혜가 풍성하다는 걸 모든 세대에 알려주기 위해서, 그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자들의 삶이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나의 삶이 실은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작품이 되도록 말이죠.

오늘 읽은 말씀도 구원받기 이전과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대조해서 조명해 줍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오늘 읽은 말씀이 에베소서의 정수(精髓)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또 수평적인 관계회복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서가 실은 ‘바울신학의 정수(精髓)’라고 표현을 하죠. 
본문 11-13절 상반부까지는 주님을 만나기전의 모습을 다시 조명해줍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너희들의 과거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때의 삶이 어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육체를 좇아 사는 이방인이지 않았더냐? 그때는 할례를 받은 무리들로부터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비방 받지 않았더냐? 그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지 않았더냐? 그때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지 않았더냐? 그때는 약속의 언약을 받지 못한 외인이지 않았더냐? 그로 인해 세상에서 소망도 없었고, 하나님도 전혀 모르던 자들 아니더냐? 그만큼 이전에는 멀리 있던 너희들이 아니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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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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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놓고 대조하는 이야기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방인의 관점에서는 버림받은 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유대인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긍심이 있었고, 또 할례를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버림받은 외인이 아니더냐,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에베소교회의 이방인들, 그리고 소아시아 7교회의 이방인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죠. 정말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은혜가 없었다면 영영 그렇게 외인으로 끝나버리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13절 하반절에서 16절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전에는 그렇게 하나님과 무관한 자로 멀리 있던 너희들이 이제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그 주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주신 분이라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평이시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다는 것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의 원수된 것을 그 분의 십자가 죽으심의 육체로 허물어주셨고, 화평을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은 율법 조문의 조항들을 다 폐하신 일이고, 그 분이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과 화평케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은혜가 없었다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담도 허물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었다는 뜻이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가 회복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 곧 십자가 대속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수직적인 관계의 차원이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 다음 구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 17-19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너희들과 같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도, 또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민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한 성도 곧 주님의 구별된 무리로서, 하늘 나라의 시민이자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통해 하나님과 수직적인 차원에서 화평이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수평적으로 화평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를 위해 너희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 있어서 최우선시돼야 할 것은 예배죠. 그러나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교회의 존재이유는 희박할 뿐입니다. 수평적인 차원의 관계회복, 곧 교제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또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권면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위로 수직적인 차원과 아래로 수평적인 차원의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소 서로서로가 주님의 몸을 받드는 건물임을 밝혀줍니다. 본문 20-2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너희는, 하는 이 말은 너희가 함께 모여 주님의 뜻을 받드는 교회는,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터의 모퉁잇돌은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을 받드는 몸이죠. 그래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과 수직적인 차원의 관계 회복이 일어나고, 아래로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과 관계 회복을 위해 교제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드는 삶이요, 그것이 성령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일깨워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 않을 때에는 세상 사람이요, 외인이요, 육체만을 위해 사는 사탄의 영향력 속에 살던 자였죠.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래로, 곧 나와 더불어 사는 교우들과 함께, 수평적으로도 화평을 이루는 삶, 곧 주님 안에서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는 그 교제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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