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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13)_2022년6월26일 주일낮설교문

by 똑똑이채널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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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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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어떤 여자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예쁘게 생긴 앵무새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말했죠.

“이 새는 크리스천 앵무새랍니다.”

“네? 그럼 이 앵무새가 예수님을 믿는단 말인가요?”

“못 믿겠으면 직접 보여드리죠”

 

그러면서 주인은 앵무새의 오른쪽 다리에 묶인 줄을 잡아 당겼습니다.

그러자 앵무새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면서 주님의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여자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죠.

주인은 더욱 신이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가지 더 보여드릴까요?”

그러면서 그 주인은 앵무새의 왼쪽 다리에 묶인 줄을 잡아 당겼습니다.

그러자 앵무새는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하면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란 여자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물어봤죠.

“그럼 양쪽 줄을 모두 잡아당기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앵무새가 나서서 먼저 말했습니다.

“보여주긴 뭘 보여줘. 두 줄을 잡아당기면 엉덩방아만 찧지!”

 

(깨달음)웃자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도 깨달음을 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주님의기도나 사도신경이 앵무새와 같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 말입니다.

앵무새가 되뇌이는 그 신비로움 앞에 뭔가 자꾸 요구하는 그 여자처럼 우리의 기도도 주님께 뭔가를 요구하는 수준의 기도는 아닌지 말입니다.

(적용)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나를 중심에 놓고 되뇌이고 반복하는 중언부언의 기도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그 당시의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나를 중심에 놓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 심령의 중심에 모시고 하는 기도여야 하죠.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을 명확하게 알고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기도해야, 바른 응답을 받을 수 있겠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12제자 곧 12사도에게 당신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상 종교인들과는 다른 기도를 하도록 알려주신 것이었죠.

이방인의 차원과는 다른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기도하기를 바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차원을 일깨워주시면서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랍비들의 제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이 큰 소리로 떠벌리며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풍습이 있었던 거죠.

그것은 자기 자신이 기도한다는 것을 세상에 자랑하고 과시하는 기도의 모습이었죠.

그럴 바엔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차원에서 새로운 기도를 알려주셨죠.

 

그것은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거나 대표기도 하지 말라거나 오직 골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죠.

너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차원으로 기도해 왔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만큼 너희 자신을 너희 중심에 두고 기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신 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사회의 랍비를 따르는 제자들이나 그 당시 세상 종교인들은 모두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것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귀가 멀어서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한 것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이었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소원성취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인간의 속사정을 모두 알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 아닙니까?

그렇기에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라는 뜻이죠.

그만큼 나를 중심에 놓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뜻을 좇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차원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12사도에게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은 매일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사셨습니까?

기도하되 나를 중심에 놓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나를 중심에 놓고 기도했다면 ‘돌탑을 허문 옥동’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내 심령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했다면 주님의기도를 드린 분이겠죠?

저와 여러분들은 나를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기도보다 오직 오직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모시고 기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주님은 그런 자녀들의 기도를 기뻐받으시고 선한 응답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기도’ 첫 부분입니다.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원해)주님께서 ‘너희들은 앞으로 이렇게 기도하라’하면서 첫 운을 뗀 말이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문에는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로 돼 있죠.

‘아버지- 우리- 그- 안에- 하늘들’입니다.

지역하면 ‘그 하늘들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이죠.

 

헬라어 원문에 나오는 첫 번째 말은 ‘파테르’ 곧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도 곧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시면서 무슨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버지’죠.

 

왜 ‘아버지’라는 말을 맨 먼저 하신 것입니까?

너희들이 앞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기도하라는 것이죠.

불교의 마호메트나 이슬람의 알라나 무속인들이 하듯이 귀신에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기도라는 거죠.

너희들이 기도하는 대상을 명확하게 해야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고 응답하실 게 아니냐는 뜻이죠.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은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말이죠.

기도할 때 ‘존귀하신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은 말로 시작하면 어떻습니까?

조금 위엄스럽고 거리가 느껴지는 고백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작하는 기도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아버지’라고 부르는 말은 친근감이 있는 말이죠.

주님의기도는 두려움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기도가 아니라 친근감의 대상인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

 

(원성)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 탕자가 굶어 죽게 되어 아버지를 향해 돌아갑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버지를 못 알아보는데 아버지는 벌써 동네 밖에서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아들이 돌아가 아버지를 향해 제일 먼저 부른 호칭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말 ‘파테르’입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그 기도의 첫마디와 똑같은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뒤에 나오는 말이 있어도 그저 ‘아버지’하고 한마디만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회복이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아버지’하고 하나님께 부를 때 그런 감동이 밀려든다면 우리의 기도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탕자가 ‘아버지’하고 부르면서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15:21)

 

그 아들은 그때 아버지를 세 번씩이나 불렀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그 아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하고 세 번씩 부르면서 고백하는데 어느 아버지가 그 아들을 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을 향해 그 탕자처럼 ‘아버지’하고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도 친근하게 품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깨달음)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남자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도 지으셨고 여자도 지으신 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있는 것이죠.

달리 말해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니신 분입니다.

 

부성이라 함은 강함, 능력, 거대한 힘, 그런 것들을 연상할 수 있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앗수르 대군 18만 5천명을 하룻저녁에 송장으로 만들어 버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부성과 같죠.

모성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듯 당신의 자녀를 지켜주시는 분의 모습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남성성과 여성성, 부성과 모성을 지닌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모성애가 약해지는 게 아니라 부성과 모성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붙드시는 분이시죠.

 

(원해)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신 게 아니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14:36)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기에 바울도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하죠.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

 

(깨달음)어떻습니까?

‘아버지’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불러도 왠지 아버지가 뭐든지 도와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빠’하고 부르면 갓난 아이가 아빠에게 재롱을 부리며 뭔가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모습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아빠 아버지’하면서 친근감을 갖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바울도 우리 모두가 주님안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다는 거죠.

 

(적용)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기도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기도하는 대상을 바르게 알고서 기도해야 기도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발췌)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꽃다운 나이에 혼자되어 자식을 생명같이 여기며 외아들을 키워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가시고기처럼 자기 몸이 으스러지는 줄도 모르고 자식을 위해 분에 넘치도록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정착하게 됐습니다.

아들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달 정성을 담아 송금을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굶주렸고 동네의 험한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아들을 향해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도착하기 전, 마을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할머니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할머니의 고통은 자기들의 무관심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 병원도 못 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갖은 고생을 다한 할머니의 방 벽에는 달마다 송금해온 아들의 수표가 도배돼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할머니는 아들이 보내온 수표를 단순히 편지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수표를 바라보며 그 아들을 그리워만 하고 있던 것이었죠.

그러다가 병원도 가보지 못한 채 죽고 만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모르면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이죠.

모르면 아무리 귀한 것을 갖고 있어도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들의 편지 속에 들어있는 수표가 돈인 줄 알았다면 그 어머니는 구차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표도 그러할진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님의기도는 어떻겠습니까?

주님의기도는 이 세상 수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신 분임을 알려주신 것 아닙니까?

‘아빠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는 주님 안에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게 하시는 ‘영적인 백지수표’와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주문)그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하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기도할 때 앵무새처럼 주문 외우듯 기도하고 있지는 않느냐?”

너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온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느냐 아니면 너를 중심에 놓고 기도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께서 부성과 모성을 지닌 분으로 모시고 기도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친근히 여기며 기도하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기도해야 너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바르게 응답해주실 것 아니겠느냐?”

그 어머니처럼 아들이 수표를 수표인줄도 모르듯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모른 채 기도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그 주권과 능력으로 너에게 역사하실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기도할 때 너를 과시하거나 자랑하거나 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온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길 원한다.”

하나님을 영적인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부성애와 모성애를 바라보면서 기도하길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길 원하는 분이니 아버지의 능력과 영광을 믿고 기도하길 원한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아빠라고 부르면서 더욱 친근히 하나님을 대하면서 기도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네가 기도하는 대상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어린 자녀를 기꺼이 도우시는 아빠임을 네가 잊지 말고 기도했으면 좋겠구나.”

 

(찬양)하나님은 너를 만드시는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는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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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신 게 또 하나 있죠.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원해)헬라어 원문은 ‘하늘’이라고 나온 게 아니라 ‘우라노이스’(οὐρανοῖς) 곧 ‘하늘들’이라고 돼 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들’ 곧 ‘우주 만물 가운데 계신’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든 곳에 계시는 분임을 뜻하는 말이죠.

 

(적용)이것은 야곱의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버렸고, 아버지가 장자에게 축복하는 그 권한까지 가로채버렸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욕심이 많은 기질을 갖고 태어났고, 커가면서 남을 약탈하는 사기꾼 기질까지 드러냈던 것이죠.

다만 한 가지 형이 들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이방 풍습에 빠져 있었다면, 야곱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죠.

영적인 모습으로 비춰보면 형 에서는 자기 능력을 의지하면서 세상 종교에 도취된 자였다면, 야곱은 사기꾼 기질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긴 자였죠.

 

그로 인해 어떻게 됩니까?

야곱이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권한까지 별미를 만들어 가로챘을 때 형이 그럴 알고서 죽이려고 했죠.

그때 이삭과 리브가는 한 날에 두 아들을 잃을 수 없다면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야곱을 떠나보내죠.

그래서 그 길목을 향해 가던 야곱이 루스라는 곳에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자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꿈에 사닥다리를 통해 내려오셨죠.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3-15)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내가 너를 통해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20년간 생고생을 하면서 살때도 부성과 모성으로 품으시고 도와주셨죠.

20년이 지나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야곱이 외삼촌에게 화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지점인 얍복강에 이르렀을 때였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20년 전 꿈에 사닥다리를 통해 내려오셨던 것처럼 그날밤 야곱이 기도하는 가운데 내려오셨죠.

그리고는 야곱이 하나님 곧 천사와 씨름하면서 놓지를 않았는데 천사가 환도뼈를 치고 나서야 야곱이 놓아줬죠.

그때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겼다는 뜻이죠.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난관의 길목에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까?

네가 돌아오는 길목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했다면, 아무렇지 않게 지켜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절게 된 것은 그 20년 동안에 함께 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마지막에라도 야곱을 바르게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 곧 함께 하신 하나님의 긍휼이셨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야곱이 살고 있던 그 가정 곧 이스라엘의 땅 브엘세바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낯선 길을 가던 루스라는 땅에도 함께 계셨고, 이방 땅 밧단 아람에도 20년 동안 함께 해주셨죠.

그리고 야곱이 돌아오는 얍복강에서 꿈에 환상가운데 나타나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 마지막까지 바르게 세워주시려 했던 것이죠.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곳에 편만하게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이 예배당에도 계신 분이요, 내가 일하는 일터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이시죠.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헛된 것을 구하거나 허황된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는 분임을 안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바른 것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그를 바르게 세우고자 하신 것도 바로 그런 뜻이었죠.

그만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참된 것을 구하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어리석고 아둔해서 주님의기도를 모를 때는 저를 중심에만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기도를 알고 나서는 그렇게 기도할 수가 없겠네요.”

하나님은 내게 아빠 아버지이시고, 하늘들에 계신 아빠 아버지로서 내가 거하는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분이에요.”

그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셨듯이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야곱을 바르게 세우고자 그의 환도뼈까지 치셨어요.”

제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그 모습 그대로 내 삶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해주세요.”

이제부터 헛된 것이나 허황된 것을 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간구하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세상 그무엇 그누구보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너와 같이 있고 싶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중에도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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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관과 능력으로, 당신의 부성과 모성으로 우리를 친히 도우시고 품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녀된 특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기도의 대상 곧 ‘아빠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 곧 내가 머물고 있는 그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앵무새처럼 주문외우듯 나를 중심에 놓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 중심에 모시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아들이 보낸 수표를 종이짝처럼 여긴 그 어머니와는 달리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백지수표와 같다는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힘든 과정을 보낼때도 함께 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과도 친히 함께 하시는 아빠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그런 아빠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자는 삶 속에서도 아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좇아 살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으며, 어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주님의기도를 통해 놀라운 응답을 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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