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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욥32:1~22)

by 권또또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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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의 서두는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아 큰 고난을 당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욥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까지는 가지지 못했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기에 사탄이 자기 마음대로 의인을 조정하거나, 의인을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사탄의 영향력을 너무 극대화할 필요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것보다는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힌 삶을 살고 있는냐, 하는 것을 더 의식할 필요가 있는 법이죠.

그와 같은 서두에 비해, 욥기서의 결말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욥이 고난을 잘 통과해서 결국은 갑절의 복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끝이 나죠. 물론 우리가 욥이 세 친구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또 어제까지 그 막간의 내용을 통해서 살펴 볼 때 욥이 고난당할 때 100% 하나님을 신뢰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또 고난당할 때에 100%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에도 욥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더 고난의 길을 잘 통과했다고 평가할 수 있죠. 그것은 욥이 잘 나고 능력이 있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도 그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임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죠. 그래서 결론 부분에 욥이 갑절의 복을 받고,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죠.

그렇다면 욥기서의 서두와 결말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27장까지가 욥과 세 명의 친구들과의 대화 곧 토론이었고, 28~31장까지가 막간 곧 욥의 독백이었죠. 그리고 오늘 읽은 32장부터 하나님께서 등장하시기 직전까지인 37장까지 엘리후가 등장해 욥과 세 명의 친구들에게 자기 의견을 개진한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 역시 대화 부분으로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조명하면, 서론, 토론, 결론, 이런 식으로 욥기서가 구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 37장까지 또 다른 토론자인 엘리후가 등장하는데, 왜 그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가 등장하는 배경이 무엇일까요? 사실 욥이 극심한 고난을 받을 때 욥의 세 친구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미 사람 소발이었죠. 그들은 처음 7일 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욥이 자기 생일을 비통해 하니까, 그때부터 욥을 책망하고 인과응보식으로 몰아부쳤죠. 그때마다 욥은 자기 의로움을 항변하고 나섰죠.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거품을 품고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내재성, 곧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신실하심에 대해서는 내비치지 않았죠. 바꿔 말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심판자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욥과 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들이 놓쳐 버린 것이었죠. 그것이 욥기서 4~27장까지 계속되었죠. 그리고 막간을 이용한 28~31장까지 욥은 독백하듯이, 자신의 과거를 반추했고, 또 고통 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탄식했고,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조차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모습 앞에 마지막으로 자기 의로움을 주장했죠. 자기 자신은 불의를 탐한 자가 아니요, 남의 아내를 탐한 적도 없는 자라고, 만일 그랬다면 세상 법정에 벌써 섰을 것이라고, 오히려 자기 자신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돕고 베풀며 살았노라고, 그러니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고소장이라도 써서 내게 가져오라고 항변했죠.

그것이 4~27장까지 나온 욥과 세 친구의 대화요 토론인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솔직히 듣는 우리로서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까? 왜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되풀이하는지 말이죠. 세 친구는 인과응보식의 관점으로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고, 또 욥은 그에 대해 자기 의로움을 항변하는 그 모습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으로서는 솔직히 짜증이 날 지경이죠.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그 현장에 있던 또 한 사람, 바로 엘리후라는 사람도 짜증이 났던 것이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엘리후가 자기 의견을 낸 이유를 자기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욥에게 화를 낸 것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하는 이유 때문이고, 욥의 세 친구들에게 화를 낸 것은 그들이 욥에게 대답도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끼어드는 형국이죠.

 

그렇다면 엘리후는 그들 세 친구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32장은 욥을 소개하는 서론 부분처럼 엘리후를 소개하는 서론 부분의 말씀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내일부터 살펴볼 33~37장까지 계속 펼쳐집니다. 물론 욥은 엘리후의 논술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은 욥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욥의 세 친구조차 토를 달지 못하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엘리후가 등장해 토론한 이후에 곧장 하나님께서 등장한다는 사실, 그래서 엘리후는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으로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처럼 허풍쟁이가 아니라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격처럼 진정한 중재자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엘리후를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를 상징하는 인물로까지 해석하기도 하죠. 그만큼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 간에 중재자 역할을 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엘리후의 어떤 면이 그런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던 걸까요? 본문 2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리겔의 아들 엘리후라고 소개합니다.

엘리후는 종족, 다시 말해 ''(the family of Ram)의 가문에 속한 '부스족(Buzite)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 가문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룻기서 419~22을 보면 람은 다윗의 선조입니다. 다시 말해 엘리후는 유다 지파의 후손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스족은 창세기 2220~21절을 볼 때 나홀곧 아브라함과 형제 사이입니다. 엘리후도 그만큼 아브라함과 혈족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엘리후라는 이름의 뜻은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그의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이 복 주신다또는 하나님이여 복을 주소서하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만큼 엘리후나 그 아버지 바라겔이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과 토론을 벌였던 세 명의 친구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나,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은 실은 욥과 거리감이 있는 족속들이 아니고, 또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죠. 대신에 엘리후는 욥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같은 이스라엘 동족이라는 점, 그것이 욥과 세 친구 사이에서 중재자로 설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살펴보면 알겠지만, 엘리후가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은 큰 틀에서 볼 때 그것입니다. 욥이 주장한 욥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는 것, 더 나아가 욥의 세 친구가 주장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관점을 동조를 하는 것, 욥도 그만큼 옳고 그 친구들의 관점도 그만큼 옳다고 공감해 주는 것이죠. 그를 통해서 서로 대립되는 시각을 겸손하게 하도록 해 주는 역할, 상대방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가 행한 중재자 역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아는 누군가 서로 다투고 있을 때 어떻게 중자재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둘의 옳은 점을 공감해 주는 것, 그러면서 서로 다른 시선을 한 발자국 물러나서 겸손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 그것이 중재자의 모습입니다. 실은 예수님께서도 참된 중재자이셨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과 무흠하신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5:9)하고 말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중재자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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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욥과 세 명의 친구의 대화가 끝나고 이제 그들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지혜로운 새로운 사람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그는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요, 욥과 친구들 간에 중재자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저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중재의 삶을 좇아,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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