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옛날에는 여인에게 있어서 인생의 4단계가 있었습니다.
소녀, 처녀, 아줌마 그리고 할머니였죠.
요즘은 그 4단계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소녀, 처녀, 아줌마 그리고 할머니가 아닌 ‘보톡스 아줌마’로 말이죠.
그만큼 젊어지고 싶은 욕심을 풍자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얼굴의 주름살은 없애도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 있죠.
마음의 주름살이 그것입니다.
의료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마음의 근심, 마음의 주름살은 더욱더 늘어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예화2) 세 사람이 천국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지기가 세 사람에게 말하기를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들어준다고 말이죠.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은 돈에 한이 맺힌 사람이라 돈 많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문지기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권력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권세를 갖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이 부탁할 차례였습니다.
그는 여자를 구한다고 문지기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문지기가 세 번째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잠언의 말씀을 꿰고 있는 남자답게 이런 여자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착한 여자, 날이 새기전 음식을 준비하고 밤늦도록 일을 해서 가정 경제를 일으키는 부지런한 여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따뜻한 여자, 남편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내조를 잘 하는 여자라고 말이죠.
그런 여자를 구해 줄 수 있겠냐고 말할 때, 그 문지기가 과연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 문지기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애끼, 이 사람아! 그런 여자가 있으면 널 주겠느냐. 내가 데리고 살지.”
(깨달음) 이상과 같은 이야기가 무엇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여성들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왜 젊어보이고 싶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남성들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돈과 명예와 권력과 또 현모양처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적용)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세대의 풍조를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는 세대의 풍조는 그야말로 100년 안팎에 사라질 물거품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하고 본받아야 할 풍조는 하나님나라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엮어나가고, 아래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나라 말입니다.
그것만이 100년 안팎에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여주신 삶이 바로 그 삶이요, 사도 바울이 주님을 본받아 산 삶이 바로 그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3개월간 머물 때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써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 때 로마교회의 소식이 바로 그곳에까지 전해온 것이었습니다.
본래 로마교회는 누군가의 전도나 선교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날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충만함 가운데 각나라의 방언을 하는데, 그때 세계 16개국에서 온 이들이 다 알아듣는 말이었죠.
바로 그때 참석한 이들 중에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120명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로마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하며 말씀을 나누었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었죠.
그리고 그들이 로마에 돌아가 자신들끼리 모임을 가지며 복음을 전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로마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었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어떤 모습과 같은 것일까요?
우리나라의 성결교회가 태동된 때가 1907년 5월 30일 경이었습니다.
그전에 정빈과 김상준 두 사람이 일본에 건너가 동경성서학원에 다녔고 그곳에서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며 한국에 돌아왔죠.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서울의 무교동 곧 지금의 염곡동에 복음전도관을 열고 북을 치며 전도에 나섰죠.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태동이 됐고, 지금껏 115년의 역사를 걸어오게 된 것이죠.
바로 그처럼 로마교회의 태동도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온 그 로마 성도들이 로마에 돌아가 로마교회를 세웠고, 그들의 믿음의 소식이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얼마나 감격스러워했겠습니까?
자기 일생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로마에 벌써부터 로마교회가 생겼다고 하니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 편지를 써서 보낸 게 우리가 읽은 로마서입니다.
그때 바울이 어떤 목적으로 무슨 내용을 써서 이 편지를 써 보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초신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1차와 2차와 3차에 걸며 직접 들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교회가 아니라 그야말로 백지와 같은 새신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도 복음에 대해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써 내려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16장까지 바울이 써 보낼 때 전반부 1-11장까지는 이신칭의에 대해서 써 보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구원이란 무엇인지, 그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게 그것이죠.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를 안고 태어난 죄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 말이죠.
바로 그런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영생에 이르는 것이고, 그 영생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돼야 받을 수 있는 것이죠.
바로 그 길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한 것이죠.
그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 곧 믿음으로 의롭게 칭함받는다는 교리를 로마서 1-11장까지 써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의 후반부 곧 12-16장까지는 어떤 내용을 써 보냈을까요?
로마서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써 보낸 편지입니다.
전반부는 구원의 교리편이라면 후반부는 구원의 실천편이죠.
그 구원의 실천편 중에서도 로마서 12장은 맨 먼저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본문 1절은 우리가 ‘신년0시예배’ 때 살펴본 말씀이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하는 말씀 말이죠.
제사를 드린 목적에 따라 다섯가지 제사유형 곧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그것이죠.
제사 유형에 따라서는 불로 태워드리는 화제, 피와 포도주와 같은 것을 부어드리는 전제,
제물을 들어올리는 거제, 그리고 상하좌우로 흔들어드리는 요제도 있다고 했죠.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부어드린 전제와 같이, 모래시계의 남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도록 했죠.
(본문)오늘 읽은 본문은 그 이후의 말씀인데,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어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헬라어 원문은 ‘본받지 말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본받다’는 헬라어 ‘쉬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ζω)는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의 패턴을 따르다’(to conform one's self to another's pattern)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두 번 사용되었는데 베드로전서 1장 14절에도 쓰여 있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예전에 주님을 모를 때에는 너희들이 세상의 욕심을 본받아 살지 않았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의 욕심 곧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주님을 본받아 살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의 첫 장에서 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까?
로마교회 성도들은 로마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의 그 세대를 본받아 살고 있기 때문이죠.
로마 황제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고, 로마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아 사는 것 말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들이 사치와 방탕과 쾌락을 좇아 사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마치 그것들을 신처럼 떠받들고 사는 그 세대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절대로 본받지 마십시오, 하고 권면하는 거죠.
(깨달음)그것은 서두에서 꺼낸 요즘 풍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젊어지려고 보톡스를 맞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남성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 다가서려고 하고, 현모양처를 통해 자기 야욕을 이루려고 하는 모습 말이죠.
(적용) 그러나 바울은 그런 세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무엇을 본받아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부정문으로 ‘본받지 말라’고 하는데, 바울이 ‘본받으라’고 긍정문으로 권면한 말씀이 있죠.
(원성) 고린도전서 11장 1-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원성2) 에베소서 5장 1절을 통해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원성3)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원해) 이 말씀 속에서 ‘본받다’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명령형의 말씀이죠.
그런데 이때 사용된 ‘본받다’는 헬라어 단어는 본문의 ‘쉬스케마티조’가 아니라 ‘미메테스’(μιμητής)입니다.
그 뜻은 ‘따르다’(follow), ‘모방하다’(an imitator)는 의미입니다.
(깨달음)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바가 뭐라는 것입니까?
에베소교회 성도들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바가 뭐라는 것입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말고 진정으로 본받도록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바로 그것을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제물되기까지 순종한 그 삶을, 우리로 하여금 뒤따르며 살라는 거죠.
바울이 전제와 같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린 그 삶을 저와 여러분도 뒤따르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일시적인 이 세상 것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하고 무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우리 자신이 이 세상풍조를 본받지 말고 주님을 본받아 따르는 삶을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 세상 풍조를 본받아 살고 있지 않느냐?”
“너는 이 세상의 여성들이 추구하는 그 삶을, 너는 이 세상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그 삶을 본받아 살고 있지 않느냐?”
“로마에 사는 사람들은 황제를 신처럼 떠받들고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신처럼 떠받들고 사는데 너는 그걸 본받고 살지 않느냐?”
“바울은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라고 권면하는데 너는 그 삶을 본받아 따르고 있느냐?”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던 그 삶을 따르며 살라고 권면하는데 너는 그 삶을 본받아 따르고 있느냐?”
“바울은 전제와 같이 자기 삶의 모래시계 윗부분을 하나님께 부어드렸는데 너는 그 삶을 본받아 뒤따르고 있느냐?”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따르고, 주님의 순종을 본받아 따르고, 바울처럼 네 인생의 모래시계를 주님나라를 위해 바치며 사는 삶이 왜 힘들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 세상에 흘러가는 세상 풍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네가 안다면 왜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본받아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세상 풍조의 것들과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하기 때문이요 변하지 않는 영생의 것이니 말이다.”
“네가 이 세상 풍조를 본받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만이 영원한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해라.”
“바울이 그것을 좇아 산 것처럼 너도 그런 삶을 따르며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내가 너를 축복하노라
(발췌)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파티〉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지구촌교회를 목회하신 이동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원로 목사님으로 계신 분이죠.
그분이 한때 미국의 워싱턴지구촌교회에서 10년 넘게 이민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워싱턴 지구촌교회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집사님 내외분이 계셨습니다.
남편과 부인 모두 의사였죠.
그런데 부인은 미국에 온 이후 의사 활동을 중단했고 남편만 의사로 일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 이동원 목사님이 그 교회에 갔을 때 두 분은 주치의처럼 섬겨주셨습니다.
한 1년 쯤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밤 12시쯤에 전화가 걸려왔죠.
그 남편 집사님이 전화기에 대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가 죽을 것 같아요.”
그때 이동원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왜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원에 와서 수술 중인데 어떻게 혈관을 잘못 건드렸는지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의사인데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겠습니까?
“목사님 제 아내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기도해 주세요”
그 무렵 이동원 목사님은 기도에 대한 갈증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책들을 계속 읽고 있었죠.
물론 이동원 목사님 자신은 별로 기도를 많이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가 부족해도 여러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회 집사님 서너 분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부탁을 했죠.
“최집사님이 수술중인데 피가 멎지 않는다고 하니,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집사님들이 다른 몇 분에게 전화를 해서 기도해 달라고 해주세요.”
“저는 지금 당장 병원에 갈테니까 함께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고, 기도를 한 뒤에, 그의 아내분과 함께 옷을 입고 병원으로 향했죠.
그때가 겨울이었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때는 워싱턴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이 익숙치 않은데, 조지타운 병원을 한 번도 해매지 않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30분 만에 도착해서 2층 수술실로 올라가는데 입구에서 남편이 자신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님은 그 점잖은 분의 입술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처음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목사님. 피가 멎었어요. 방금 전에 극적으로 멎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드리고 돌아왔는데, 다음주일날 중보기도한 일을 조사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한 밤 중에 열 한 가정이 밤에 일어나서 즉각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동원 목사님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중보기도 사역이 이런 것이구나.”하고 말입니다.
바로 그 사건을 계기로 중보기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관심을 키워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그걸 놓고 내가 기도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할지 모릅니다.
의사도 못하는데, 무슨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멈춰주시겠어요. 할지 말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 사람들의 대부분의 풍조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신다면 기꺼이 그 생명의 피도 멈추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그 분의 피가 멎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흔들어깨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통해서 한 영혼을 살리시고, 또 그런 방법을 통해서 기도에 잠든 영혼들을 흔들어깨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이 세대와 다른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발췌2) 이동원 목사님이 워싱턴지구촌교회에서 7년 안식년을 맞아 쉼을 얻으며 더욱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치유 사역에 대한 책도 많이 읽고 좋은 세미나가 있으면 참석도 했습니다.
당시는 존 윔버라는 분에 의해 제3의 물결운동이 펼쳐졌고 성령과 치유사역이 지속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빈야드 교회라든지 갈보리 채플 같은 계통의 교회들도 방문을 했죠.
그런 교회에 가보면 확실히 다른 분위가기 있었습니다.
찬송을 많이 부르고 또 예배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붙들고 기도를 많이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비전통적인 교회에 가면 예배의 끝마무리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나와서 기도를 받는 것이었죠.
이동원 목사님도 사모님과 함께 그렇게 나가서 기도를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걸까?’하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 동안 사모님은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자기 자신은 가시적인 형태의 경험들이 기대한만큼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안식년이 끝날 무렵에 교회에 돌아오서 보니까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니까 무언가 꽉 찬 것 같은 느낌이었죠.
전에는 마음이 비어 있었는데 이제는 무언가 충만한 느낌이 든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에 불평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성도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를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면 전에는 다 가버렸는데, 이제는 자신도 그렇게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기도하고 싶은 사람, 저에게 기도받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오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함께 기도를 받겠다고 나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기도를 받았는데 병이 나았고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기도를 받다가 일종의 안식 상태에 들어간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어떤 분은 30분 또 어떤 분은 1시간 있다가 일어난 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너무너무 깨끗해졌어요. 제 마음에 평화가 임했어요.”하고 말이죠.
나중에는 20명 30명으로 늘어나니까, 그때부터는 중보기도 사역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군가 다급한 일이 생겨 저에게 한 밤중에 전화를 걸 수 밖에 없을 때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성도님가운데 제게 다급한 전화를 걸어와서 제가 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여러분은 저와 함께 그 밤에 깨어서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배 후에 기도를 받고 싶은 분은 앞으로 나와 기도를 받으세요 한다면, 여러분은 그런 마음이 생길 때 기도를 받으시겠습니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까?
전통만 중시하는 교회는 그 전통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와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의술만 중시하는 사람은 그 의술을 맹신하는 것 때문에 성령님의 치유 역사와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죠.
우리는 지정의 모든 상태에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이요 의술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도 믿는 자녀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에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정말로 다급할 때는 저의 목사님을 깨워서 기도를 받게 해 주세요.”
“주님. 집사님 권사님 성도님이 다급하다고 할 때 교회 성도들을 깨워서라도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영적인 팀웍을 이루게 해 주세요.”
“우리교회도 중보기도팀이 가동되면 좋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원이 되게 해주세요.”
“이 세대는 전통신앙만을 본받도록 하지만 주님께서는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도 본받기를 원하시는 줄 믿어요.”
“이 세대는 의술과 과학만 맹신하지만 주님께선즌 성령의 치유사역도 본받도록 원하시는 줄 믿어요.”
“주님. 지금도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에 순종하며 따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세요.”
“저를 주님 나라의 도구로 친히 사용해 주세요.”
“제 시간을 주님나라를 위해 전제로 드리게 해 주세요.”
(찬양)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뒤따르며 살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 풍조를 좇아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좇아 사는 삶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일시적인 찰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본받아 뒤따르며 사는 자들은 그 삶이 영원영원한 가치로 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을 전제로 부어드렸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모래시계의 남은 윗부분의 인생을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성도와 이웃을 내 몸처럼 더욱더 사랑하는 인생을 주님께 쏟아부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뭔가 다급하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그 인생도 주님나라의 전제와 같이 부어드리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그 인생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인생들과는 달리 영원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의 귀한 면류관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