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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부터 11장 1절까지 그리스도인의 결혼문제, 우상제물의 취식문제, 성찬의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1장 2절부터 14장까지는 공적예배에 대한 답변인데 지난 11장에서는 예배포 착용에 대한 질문에 관해서 사도 바울의 답변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12장은 영적 은사, 13장은 사랑의 은사, 14장은 특별히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답변을 사도 바울이 해 줍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성령의 은사에 관한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역사가 긴 고등종교는 불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스님들이 서로 자신들의 도가 깊다고 경쟁을 한 데 있습니다. 가령 불자 세계라는 한정된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내 도가 높다, 너의 도가 낮다, 그런 도가 불교계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부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불자라면 그걸 내세울 필요가 없죠. 오히려 부처님의 법을 이용해서 자신들을 내세우려는 스님들이 자기 교만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걸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타락할 때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모든 종교가 타락할 때는 신앙의 교만으로 나타나는데, 기독교도 영적 교만과 늘 정비례하여 타락했습니다. 가령, 내가 영적으로 가장 큰 사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은사가 가장 크다고 하면, 그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는 자죠.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하나님도 그리고 사람도 보이지 않게 되죠. 자신이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교만함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부인해야 할 사람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를 더 높이는 도구로 삼게 되죠. 그렇기에 영적 교만은 패망의 길잡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 은사가 크다고 말입니다. 그것으로 영적인 교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그 다툼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 오늘의 말씀에 담겨 있죠.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11절은 영적은사에 관한 답변이고,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영적 은사 속에서 교회의 몸의 지체인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역설이죠. 바울은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죠. 무엇을 말합니까? 신령한 것 곧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이죠.
2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유대교인들 가운데 개종한 그리스도인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었죠. 이방인 곧 헬라인들도 포함돼 있었죠. 그런데 바울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곧 과거형으로 썼습니다. 이른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죠.
그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있을 때, 곧 이방 헬라 사람들로 있을 때, 그들이 모두 신전에 가서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상에 대해 뭐라고 바울이 말합니까? ‘말 못하는 우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니까, 들을 수도 없겠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데, ‘그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우상 신전의 사제가 끄는 대로, 그 신전의 분위기가 이끄는 대로, 끌려서 빠져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더 큰 소리를 질렀고, 또 더 격렬하게 춤을 추고, 더 비싼 제물을 바쳐야 했던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왜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가서 살던 그들의 옛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성령의 은사를 받은 다음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예전처럼 우상에게 끌려가서 열광하듯이, 서로 내가 크다, 네가 크다, 하는 경쟁을 하듯이, 그렇게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잘못 이해하고 변화되지 않은 그들의 실체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 이 말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말하는 자’란 뜻입니다. 말 못하는 우상과 대비해서 지금 설명해 주는 것이죠. 우상은 말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만 성령님은 말씀도 하시고 다 듣는 분이란 뜻이죠. 그만큼 성령은 살아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자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석인 우상을 섬기는 자와 인격적인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성령으로 말하는 자이죠.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죠. 내가 떠나가면 성령님께서 오실 것이다, 하고 말이죠. 그때 요한복음 16장 1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스스로 말하는 분이 아니죠. 자기 마음대로, 곧 함부로 말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니죠. 마찬가지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을 따라 말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말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 3절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말하는 자는 예수를 가리켜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하는 율법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까닭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못 박힌 까닭에 부정한 자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의해 깨어 있는 자는 그 십자가를 보고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죠. 왜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저주받아야 할 나를 위해 대신 저주받은 구세주이신 까닭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성령과 동행하는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 그것은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 사람들의 관점이 아닌 성령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나를 대신해 죽으신 메시아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자기 은사가 크고, 영적으로 자기가 가장 깊다고 자랑하는 그들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너희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정하지 않지 않느냐? 메시아라고 하고 하지 않느냐? 그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느냐? 이것이 너희들의 지혜 때문이냐? 그렇지 않지 않느냐? 성령님께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왜 너희들의 은사를 성령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왜 성령님 위에 서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죠. 바울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면서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일깨우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받되, 그 다양한 은사 가운데 자신이 받은 것을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자랑하는 모습이란 실은 하나님을 모르기 전 이방 신전을 좇는 우상숭배자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령안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으시되, 성령 위에 서려고 하지 않는, 오히려 성령님을 더 높이는 겸손한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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