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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책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모라비안 교도

by 권또또 202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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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 후스 동상'

 

얀 후스(1369~1415)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이다.

그 루터보다 100여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이가 있다.

얀 후스가 그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인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설교했다.

더욱이 면벌부 판매의 부당함을 역설했고 일반 성도들에게도 포도주잔을 배설하여 성찬에 참여토록 했다.

그러면서 교황을 우상시하고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죄로 화형당한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후스는 29살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살에 총장이 되어 얼마든지 기존 교회와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리를 사수하고자 스스로 주님 앞에 ‘산제물’로 바쳤다.

그가 화형에 처할 당시 그의 꿈은 꺾였지만 그의 후예들을 통해 그 꿈은 지금도 살아 있다.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얀 후스는 종교와 상관없이 체코 사람들에게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얀 후스의 출생과 프라하대학 학장

얀 후스는 1369년 7월 6일 경 보헤미아 남부지역에 있는 후시네츠(Husinec)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다.

1390년경에 그는 프라하대학(카를 4세에 의해 1348년 설립되었기 때문에 카를대학으로도 불린다)의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후스는 1393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에는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후스는 프라하대학에서 강의(1398-1399)를 하는 한편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후스는 1403년 29살의 나이로 6개월 동안 프라하대학의 학장을 맡았고 1409년 다시 1년 동안 학장직을 수행했다.

그 무렵 체코의 프라하와 영국 런던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보헤미안 공주 앤이 영국 왕 리처드 2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양국간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체코 학생들도 옥스퍼드로 유학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1384년)의 사상이 프라하에 널리 소개될 수 있었다.

프라하대학에서 가르쳤던 교수들 가운데 팔레츠의 스테판(Stephen von Palecz)과 츠나임의 스타니스라우스(Stanislaus von Znaim)이 위클리프의 사상에 매료됐는데 그들은 후스의 동료였다.

물론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후스에게 전한 인물은 제롬이었다.

제롬은 후스의 제일 가는 친구요 제자이기도 했다.

후스는 영국에 유학한 일이 없었지만 제롬을 비롯한 보헤미아 유학생들을 통해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런 경로를 통해 후스도 자연스럽게 위클리프의 작품을 소개받았고 그의 저서들을 직접 손으로 필사하면서 공부했다.

 

 

로마가톨릭교회 사제 서품과 베들레헴 채플 설교자

한편 1400년에 후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 서품을 받았다.

1401년부터 프라하에 있는 성 미가엘교회에서 설교했고 1402년부터는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가 됐다.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로서 후스는 향후 10여 년 동안 약 3,000번 이상 설교를 했다.

다만 후스는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배우지 못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문장으로 구성됐다.

더욱이 체코 사람들의 정서에 잘 맞는 찬송 가사를 지어서 대중적인 찬송을 보급했다.

그래서 일반 대중들은 찬송으로 신앙의 진리를 고백했다.

지금도 베들레헴채플 벽에는 당시 회중들이 함께 불렀던 찬송의 일부가 복원돼 있다.

후스의 설교는 프라하대학의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공감대는 설교를 듣는 일반 청중들에게로 확산됐다.

체코의 종교개혁 운동은 프라하대학과 베들레헴채플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그 개혁의 선구자가 얀 후스였다.

1406년부터 위클리프 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과 시비가 프라하에서 일어났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따르려는 후스와 그 반대편에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츠비넥(Zbynek)이 입장을 달리했다.

당시 프라하대학의 교수진은 후스를 중심으로 한 체코 출신들과 츠비넥을 중심으로 한 독일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409년 1월 18일 바츨라프 4세의 크트나호라 칙령으로 황제가 대학의 체제를 개편했는데, 독일 출신 교수의 수를 대폭 줄이고 그 빈자리에 체코 출신의 교수들을 대거 채용했다.

그해 37살인 후스가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되자 체코 출신 교수들이 프라하대학을 이끌며 교회갱신과 사회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후스의 파문과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화형

1409년 새롭게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추기경 츠비넥이 자신의 선출을 도와준 보답으로 그 해 12월에 교서를 내려 후스를 공격했다.

그로 인해 후스는 설교금지 조치를 당했고 종교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후스에게 설교금지령을 내렸지만 후스는 굴복치 않았다.

그러자 교황은 1411년 3월 15일에 후스의 파문을 선포했다.

하지만 후스는 이제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 기성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에 대해서 공격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 황제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황제도 면죄부 판매를 통해서 그 일부를 자기 몫으로 가져갔으므로 재정적으로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후스는 교황뿐만 아니라 황제와도 결별하고 말았다.

결국 후스는 1412년 11월 초순에 프라하를 떠나 망명길에 나섰다.

처음에는 어느 귀족의 보호 아래 프라하 근처에서 머물다가, 1413년 4월에 남부 보헤미아로 내려가서 코지 흐라텍(Kozí Hrádek)에서 지냈고, 이후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1414년 7월 이후에는 서부 보헤미아에 있는 크라코베츠(Krakovec bei Rakoviník)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어디서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그의 설교언어는 중세교회의 라틴어가 아니라 토착 언어인 체코어였다.

1414년 독일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의회가 열렸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지기스문트(Sigismund)였다.

그 당시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었다.

더욱이 가톨릭교회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 황제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후스를 그 공의회에 참석시킨 이유가 그것이었다.

후스의 주위 사람들은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하면서 말렸다.

100년 뒤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장으로 나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당시 지기스문트 황제도 후스의 안전을 두 번씩이나 보장한다고 했다.

1414년 9월 1일 자신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은 후스는 체코 프라하 크라코 베츠에서 800km가 걸리는 독일의 콘스탄츠로 향했다.

10월 11일 콘스탄츠를 향해 출발한 후스는 20일에 걸친 11월 3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몇 주일 뒤인 11월 28일에, 그는 추기경의 명령으로 도미니칸 수도원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그 지하 감옥에서 후스는 벽에 묶여 있어 누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1414년 12월 4일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참석아래 후스를 심리하는 배심위원회가 결성됐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후스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지기스문트 황제도 세 번이나 공개석상에 후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호하도록 주선했다.

공개석상에서는 주로 권위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주제로 부각됐다.

후스의 반대파들은 공의회의 결정이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후스는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서라고 주장했다.

후스의 반대자들은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했다.

종교재판소에서 교회는 후스에게 그런 요구를 했다.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날이 밝자 후스는 나무 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불을 당기기 전 후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불길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나이 46세의 일이었다.

 

 

루터의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 제국회의장까지 700KM, 얀 후스의 프라하에서 독일의 콘스탄츠 공의회까지 800KM.

얀 후스를 바라보는 루터의 관점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을 뜻한 것이다.

철저한 개혁자요 신학자였던 후스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후스는 인쇄술이 없어서 일일이 손으로 필사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루터는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것이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이 널리 퍼져나가지 못한 이유다.

1520년 2월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그 정도로 루터 자신도 후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한 것이다.

카를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옛 시가지 광장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생전에 진정한 신앙과 보헤미아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설교했던 틴교회당이다.

틴교회당의 광장 건너편엔 옛 시가지의 명물 시계탑이 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수많은 구경꾼 머리 위에선 모래시계 주위로 12개의 인형이 도는 짧은 공연이 펼쳐진다.

해골은 죽음을, 모래시계는 ‘유한한 인생’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쓰여 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 12월 18일 프라하에서 1415년에 일어난 얀 후스 의 처형에 대해 공식적으로 공개사과했다.

 

 

헤른후트 교회내부, 온통 하얀색인 건 성결과 생명을 주창 . 장식이 없는 건 형제 자매가 보석이자 장식이기 때문. https://brunch.co.kr/@0a36ab5c6a60477/22

 

 

얀 후스와 모라비안 교도들

얀 후스가 화형당하기 전부터 체코 사람들은 동부 모라비아(Moravia)와 서부와 중부의 보헤미아(Bohemia)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동부의 모라비안들은 전통주의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무리였고 신앙의 핍박을 받았다.

얀 후스가 화형에 처하자 그를 지지하는 보헤미안 군중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1419년 프라하의 후스파 군중들은 평의원 7명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 사건으로 인해 후스파와 가톨릭 세력 간의 전쟁을 불러왔다.

이른바 ‘후스전쟁’(1419-1434)이 불리는 이 전쟁에서 후스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 전쟁을 5차례나 막으며 격퇴시켰다.

당시 후스파가 군사요충지로 건설한 도시는 프라하에서 80km 떨어진 작은 타보르였다.

그들은 수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각자의 집 지하에 식량저장 겸 창고용 지하굴을 팠다.

그 시절 땅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반공호로 만들었고 길이는 13km나 된다.

현재는 얀 후스 박물관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그 땅굴을 관람할 수 있다.

그처럼 가톨릭의 십자군과 후스파 사이의 전쟁이 지속되자 1434년 가톨릭 세력이 먼저 강화조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후스파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고 온건파는 가톨릭 세력과 동맹을 맺어 급진파를 공격했다.

결국 1434년 5월 30일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리파니’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Lipany)에서 급진 후스파가 패하면서 후스전쟁은 마무리 된다.

후스전쟁의 결과 온건 후스파는 지기스문트의 보헤미아 왕위를 인정했고 가톨릭과는 다른 의례 관습을 용인받으므로써 보헤미아에는 가톨릭과 후스주의가 공존하게 됐다.

1436년 7월 5일, 모라비아의 이흘라바에서 지기스문트 왕, 후스파 대표단, 로마 카톨릭 교회 대표들이 이 협정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서명했다.

한편 급진 후스파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라비아인들과 함께 체코 산맥을 넘어 독일 동쪽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모자’란 뜻으로 ‘주님의 피난처’)로 갔다.

그 당시 헤른후트는 체코의 국경 산맥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1722년 그곳은 근대 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모라비안교도(모라비안교회) 태동된 현장이다.

당시 헤른후트로 망명한 이들을 받아 준 이는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이다.

진젠도르프는 독일 드레스덴(Dresden)의 작센(Saxon) 선제후 고관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경건한 외할머니 손에서 경건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엄격한 경건주의 학교인 할레의 페다고기움(Pedagogium)에서 중등 교육을 받은 그는 1716-1719년에 비텐베르그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1721년 드레스덴 선제후의 사법 자문위원이 되었다.

1722년 외할머니로부터 베르텔스도르프(Bertelsdorf)의 넓은 땅을 상속받았는데 바로 그 땅을 헤른후트로 피신한 이들에게 정착지로 내주며 함께 경건의 삶을 살도록 도우며 훈련시켰다.

그들에게 경건이란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에 힘쓰며 사회적인 약한 자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삶을 위해 하루 24시간 중단 없이 지속하는 ‘기도의 탑’(a watch of continuous prayer)을 세웠다.

그를 위해 ‘로중’(Daily Watchwords, Herrnhuter Losungen)이라는 말씀 묵상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1728년 5월 3일에 시작된 로중은 현재 50개 언어로 출판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읽히는 말씀 묵상집이다.

구약성경 본문인 로중(Watchwords)은 1824개의 구절 모음 중에서 헤른후트(Herrnhut) 에서 매년 추첨을 통해 선택하고 신약성경 본문인 ‘교리 본문’을 선택해 로중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렇게 시작된 모라비안교도는 15년 만에 2명의 청년선교사를 ‘웨스트인디스’로 파송했다.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파송사역이다.

그 청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노예라도 될 수 있다”는 각오로 떠났다.

모라비안 교회는 그 후에 카리브해 전역과 터키, 서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북미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모라비안 교도와 존 웨슬리

한편 존 웨슬리는 자기 형제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하기 위해 범선(돛단배)을 탄 채 1735년 10월 런던을 떠났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 전인 1736년 1월 25일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거센 풍랑에 돛대가 부러지면서 돛이 배의 갑판을 덮어버리자 배는 방향을 읽고 무서운 파도 속에 잠겼다.

그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놀라우리만치 평온함을 보여준 이들이 눈에 뜨였다.

바로 모라비안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그 공포 속에서도 평온한 상태에서 시편으로 지어진 찬송가를 불렀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찰스 웨슬레가 물었다.

“당신들은 겁나지도 않나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겁나지 않아요”하고 모라비안 형제들이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네 아이들과 아내들도 겁나지 않나요?”라고 웨슬레가 묻자, 아주 온유한 모습으로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했다.

“우리 아이들과 아내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

무서운 풍랑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그 평온함에 웨슬레 형제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말이다.

영국과 미국을 뒤흔드는 요한 웨슬리 형제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모라비안 형제들을 초청해 신앙의 교제를 나눴다.

특히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쯤 존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네틀톤 코트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기도회에 참석해 뒷자리에 앉았다.

그날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에 받았고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제2의 회심을 했다.

이후 그의 회심은 영국의 대부흥운동의 촉발점이 되었다.

더욱이 그때의 대부흥운동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선구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후일 먼 태평양 건너 ‘숨은 은자의 나라, 조선 땅’에 최초로 선교사를 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얀 후스의 밀알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얀 후스는 누가봐도 위대한 종교개혁가였지만 루터에 비해 역사에 묻힌 인물이다.

하지만 루터는 얀 후스와 위클리프 그리고 에라스무스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라틴어로 쓴 루터의 95개 논제는 그들에게서 읽고 배우고 깨달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루터가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에 있다.

그에 비해 100년 전 종교개혁였던 얀 후스는 역사에 빛을 발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46세의 생으로 마감한 얀 후스의 꿈은 그 후예들인 모라비안 교도에 의해 지금껏 살아있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에 속한 영국의 청교도들도 국제적인 존재감은 1도 없는 모라비안 교도들에 의해 영적인 각성을 일으키게 되었다.

얀 후스는 그만큼 100년 후의 루터는 물론이고 300년 후의 존 웨슬리까지 신앙적인 영향을 끼친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한 알의 밀알이 된 그의 순교 씨앗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 가장 작은 자를 통해 개혁의 역사와 세계선교 역사를 써 내려가신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방법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참고한 국내자료]

박태상, 〈동유럽 문화예술산책〉, 생각의나무, 2002.

황영관, 〈유럽 음악 기행-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편〉, 부키, 1999.

토마스 부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이종실 옮김, 동연출판사, 2015.

이은선, 〈체코의 거위(후스), 지금도 울고 있는가〉, 월드뷰(ISSN 2234-3865) 제30권 1호(통권 199호), 2017년 01월.

박경수, 〈얀 후스의 「교회」에 나타난 교회개혁사상〉, 장신논단 Vol. 47 No. 4, 2015.

김승호, 〈신학자의 얀 후스 기행-여행으로 살펴본 체코 종교개혁 입문서〉, CLC, 2018.

이지 오떼르,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 걸어서 가보는〉, 김진아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종교개혁과 신앙의 발자취(독일,벨기에,네덜란드,오스트리아,체코,폴란드)〉, 두란노, 2011.

정미현, 〈체코 신학의 지형도〉,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5.

 

[참고한 국외자료]

TRACI ANNE BLISS HUMPHREY, 〈A BRIEF HISTORY OF THE ECCLESIOLOGY OF JAN HUS, & THE MORAVIAN MOVEMENT〉, CLEVELAND, 2016.

František Šmahel, 〈A Companion to Jan Hus〉, BRILL LEIDEN BOSTON, 2015.

Jan Hus: Church Reformer with an ineradicable influence, Published in “Friesch Dagblad”, newspaper for Fryslan, The Netherlands, July 7 2015.

 

 

[참고한 웹사이트]

https://www.academia.edu/

https://history-maps.com/story/Kingdom-of-Hungary-Late-Medieval

https://en.wikipedia.org/wiki/Moravian_Church

https://issuu.com/moravianchurchiboc/docs/september2015mikeweb/s/25676

https://brunch.co.kr/@0a36ab5c6a6047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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