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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은 시편 마지막 150편을 읽습니다. 지난 2022년 2월 26일부터 오늘까지 장장 5개월간 시편을 묵상해 왔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잠언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차례입니다.
시편을 맨 처음 읽을 때 우리가 생각한 것은 시편도 모세오경처럼 다섯권으로 묶여 있다고 했습니다. 제 1권은 시편1편—41편까지, 제2권은 시편42—72편까지, 제3권은 시편73—89편까지, 제4편은 시편90—106편까지, 그리고 마지막 제5권은 시편107—150편까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다섯 권으로 묶은 시편들은 과연 누가 썼습니까? 시편 90편 같은 경우엔 모세가 쓴 것으로, 또 다윗이 쓴 시는 73개나 되고, 시편 50편이나 시편 73-83편까지는 아삽이 쓴 것으로, 시편 42편, 시편44—49편, 시편84, 그리고 87—88편은 고라 자손이 쓴 것으로,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그리고 시편 89편은 에단이 쓴 시로 표제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시들은 누가 종합해서 편집을 했습니까? 모세가 쓴 시들은 적어도 B.C. 1400년 경의 시이고, 다윗이 썼다면 B.C.1000년 경, 솔로몬이 썼다면 B.C. 950년 경,또 아삽이나 에단과 같은 찬양대원들이 썼다면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에 쓴 시들이겠죠. 그 모든 시들, 그 다섯 권의 시들을 한 권으로 묶은 이가 바로 바벨론 포로이후의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로 추정합니다.
150편의 시편들 중에는 토라 곧 여호와의 율법에 관한 시가 들어 있고, 나라를 잃거나 고통에 처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비탄의 시도 있고, 오히려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의 시, 그리고 고난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한다는 신뢰의 고백시도 있고,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온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시온의 노래 곧 성전시도 있고, 시편 146편부터 첫머리와 끝머리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할렐루야’ 시편도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그 ‘할렐루야’ 곧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그 시의마지막 시편이자 시편 전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편 150편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50편은 우리에게 찬양에 관한 4가지 질문과 답을 제공해 줍니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어디에서 찬양할 것인가’ 하는 점이죠. 본문 1절에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기자는 ‘성소에서’ 그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권고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소란 모세의 성막이 있는 곳을 가리키죠. 그 성막은 광야에서 옮겨다니는 성소였죠.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 한다는 상징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 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다음 붙박이 성전이 되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붙박이 성전을 세우게 하신 이유는 한 가지였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 마음과 자세처럼, 성전 밖에서도 동일한 마음과 자세를 갖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말이죠. 그것은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죠.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지 말고 세상 한 복판에서도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안에만 하나님을 가둬두려고 하고, 또 그 성전 자체만을 우상으로 숭배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다시금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성전이란 예수님의 육신, 곧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죠. 그런데 그들이 우상으로 숭배하던 성전조차도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처들어 왔을 때, 완전히 다 폐허더미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 것이었죠. 그래서 참된 성전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금 사는, 우리 몸과 마음이 성전으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본문 1절에서 말하는 ‘성소’, 또 ‘권능의 궁창’이란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하심이 임하는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서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놀이터에서도, 장터에서도, 잠자는 곳에서도, 눈 뜨는 곳에서도,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소리가, 찬송의 삶이 울러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 2절에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측정이 가능한 것, 감정에 느껴지는 것에 따라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비록 감정이 찬양할만하다고 느껴지지 않더라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며, 어떠한 경우에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죠.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을 가지고 찬양하는가’입니다. 본문 3-5절에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나팔과 퉁소는 관악기이며, 비파와 수금은 현악기, 그리고 소고와 제금은 타악기입니다. 찬양을 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은 악기, 금지된 악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악기가 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예전에 교회에서 드럼을 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이었습니까? 전자 올겐 조차도 금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악기들이 다 스텐드바에서, 술집과 갸바라에서 사용되는 악기란 이유였죠. 하지만 지금은 전자올겐도 드럼도, 기타와 베이스도 다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달리 생각하면 어떤 부분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입니까? 교회 밖 세상에서 죄 속에 살다가 주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조차도 온 심령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죠. 마치 지난 주일에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나드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어드렸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씻겨 드렸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그 마리아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막달라 마리아로, 예수님 앞에서 죄사함의 은총을 받은 그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을 하죠. 물론 베다니의 마리아로 보거나 다른 마리아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동굴 무덤에 맨 먼저 찾아간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로 본다면, 아마도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도 그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그 세 여인이 실은 한 여인, 곧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을 하죠. 중요한 관점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추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사람도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는 삶, 그 삶이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본문을 통해 전해주는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누가 찬양하는가’입니다. 본문 6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그 ‘호흡’으로 판가름 납니다. 마찬가지로 그 영혼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그 호흡을 따라 나오는 ‘찬양’으로 판가름 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부터 제2의 출애굽을 일으키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속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그리고 바벨론에서 구출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유, 그 모든 이유가 곧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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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 주시는 시편의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해 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모든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도, 우리 각자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끊임없이 불러야 한다는 점이죠. 우리의 삶이 찬양의 악기가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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