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행15:36-41)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행15: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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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 갤러리. 무유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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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 얼마 전에 무안군 일로읍 죽산면 산속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임영주 도예가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죠.

 

놀랍게도 그는 무유 도자기, 말 그대로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원시인들이 쓰던 그런 토기를 빚고, 개량식 장작 가마에서 구워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값이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작은 사발 하나가 3만원이 나갔고, 큰 그릇과 항아리는 600만원이 넘었습니다.

 

(깨달음) 그런데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마련이겠죠.

 

하지만 어떻습니까?

작은 것이라도 제 위치에서 쓰임받는 사발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그릇 아니겠습니까?

 

큰 사발은 음식을 담아서 멋기에 제 격이죠.

그러나 그 큰 사발로 어찌 차를 마실 수 있겠습니까?

 

(적용) 그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마다 위치와 역할이 다 다르게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남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시기하거나, 내게 있는 것이 작다고 열등감에 흽싸일 필요가 없습니다.

시기심이나 열등감은 이 세상의 사고방식, 곧 직선의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원성)이것은 성경에서 일깨워주는 말씀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깨달음) 무슨 말씀입니까?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지만, 나무 그릇도 질 그릇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관점은 금그릇과 은그릇에만 눈길이 쏠린다는 것이죠.

왜 그렇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은 직선의 논리, 경쟁의 논리, 앞서가는 것, 잘 나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 곧 하나님의 관점은 어떤 것에 눈길을 두고 계신다는 것입니까?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것, 곧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 자체에 눈길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직선의 원리와는 다른 곡선의 원리입니다.

이른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각각 받은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쓰임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물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묻어놓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신 것이었죠.

 

(적용) 이것은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대기업의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부른 사람도 있지만, 그 기업의 직원으로 부른 사람도 있죠.

하나님께서는 대형교회를 목회하도록 부른 목회자도 있지만, 우리 지방회 홍도교회처럼 작은교회를 섬기도록 부른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직선의 관점을 지닌 이들은 다들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에게만 눈길을 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 곧 곡선의 관점을 지닌 이들은 작은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죠.

 

더욱이 하늘나라의 상급도 각각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문제점을 예루살렘 제1차 공의회의 결정문을 통해 매듭을 짓게 되었죠.

물론 그때 결정문만 가지와 와서 읽어준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동행해서 안디옥교회에 여러 날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이 있었죠.

바로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두 사람은 유대인 출신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예언자 곧 지도자 그룹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안디옥교회에 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도와 할례와 같은 율법주의 멍에를 짊어지지 않도록 권고했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었죠.

유다와 실라는 그렇게 말만 하고 끝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먹고 마시고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말만 뱉은 채, 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먹거나 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겠죠.

그만큼 신앙생활이란, 교회생활이란, 성도의 생활이란 함께 어울리며 사는 삶에 있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죠.

 

(전개)그 후에 그들은 돌아갔고, 바울과 바나바가 무엇을 했습니까?

이제 교회에 몰아닥친 풍파가 잠잠했으니, 마음 놓고 공동담임목회자로 살아가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먼저 나서서 바나바에게 말했죠.

우리가 1차 선교여행 때 돌아봤던 곳들을 돌면서 그곳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믿음으로 격려하고 왔으면 좋겠는데요?”

 

그때 바나바도 바울의 그 뜻을 흔쾌히 받아들였죠.

그럽시다, 우리가 이곳에 안주하여 있는 것보다 그렇게 나서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귀히 여기실 것 같군요.”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좋은 그 일 앞에 안 좋은 일이 터졌죠.

두 사람이 떠날 때, 요한 마가의 일로 충돌이 일어났고, 급기야 다투어 갈라선 일이 그것이었죠.

 

하지만 다투다는헬라어 파록쉬스모스’(παροξυσμς)선동’(an inciting)이나 다툼만을 뜻한 게 아니라고 했죠.

오히려 서로 다른 주장에 서로가 자극(incitement)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더 충성되게 받드는 계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본문)그래서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39-41절 말씀에 나와 있는데,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이 어떻게 갈라서게 된 것입니까?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곧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위쪽 지방을 향해 도보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이후에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이때 이후에 모든 선교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죠.

 

(깨달음)이런 모습이라면, 우리가 세상의 관점을 지난 사람들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이때부터 바울이 대단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구나.”

, 이때부터 바나바는 완전히 초라한 인물로 사라지는구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의 관점, 직선의 관점, 크고 능력있고 앞서나가는 관점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 곡선의 관점, 모든 삶 속에 각자 각자의 역할과 의미가 있음을 믿는 자의 관점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바울만 들어 쓰신 분이 아니라 바나바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위해 쓰임받게 하셨겠지, 하는 관점을 지닌는 것이죠.

 

(전개2)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나바를 어떻게 사용하셨을까요?

이때부터 사도행전의 중심인물이 바울에게 초점이 옮겨가고,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위대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바나바는 어떻습니까?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 때 요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나타나 있지 않죠.

 

그렇다면 무엇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많은 사람을 건져내는 다섯 달란트의 도구로 사용하신 게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요?

바나바는 요한 마가 한 사람을 다시 선교사로 회복시키고 소생케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점이죠.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바나바 한 사람의 격려로 온전히 주님안에 새 힘을 받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화) A.D.34년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죠.

하지만 그때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인들조차 믿어주지 않았고, 같은 동족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들었죠.

 

그러자 그는 그 성읍을 도망쳐 아라비아 광야로 갔고, 그곳에서 3년간 경건훈련을 거쳤죠.

이후에 예루살렘교회에 돌아왔는데, 야고보와 베드로 외에 누구도 만나질 못했죠.

그만큼 예루살렘교회의 모든 제자들도 모든 장로들과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바울의 신원을 보장해주려고 하지 않았죠.

바로 그때 바울 한 사람의 변화됨을 믿어주고 격려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지금 바나바가 요한 마가 한 사람을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난 것이 바로 그런 이치와 똑같은 것이죠.

바울은 여러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는 그릇이라면, 바나바는 한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는 그릇으로 쓰임받는 것 말입니다.

 

더욱이 이때 바나바의 격려를 통해 다시금 도전받고 세움받은 요한 마가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이 이후에 그는 베드로의 통역사로 섬겼고, 말년의 바울에게 동역자로 섬겼고, 마가복음까지 기록한 인물로 남게 되죠.

 

(깨달음)그렇기에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두루 넓게 많은 구원의 통로자로 사용하셨지만, 바나바는 작게 그러나 깊은 구원의 통로자로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마치 바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사용하신 것이요, 바나바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 주님은 우리가 어떤 그릇을 지녔든지 간에 그 그릇대로 쓰임받게 하시고 영광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내게 큰 그릇이든지 작은 그릇이든지, 내게 소중한 그릇이지 않더냐?”

임영주 갤러리에 있는 도자기가 작은 것은 3만원이고, 큰 것은 600만원이라 해도, 다 각각 쓰임이 다르지 않더냐?”

대형교회 섬기는 목회자의 그릇과 작은교회 섬기는 목회자 그릇이 달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않겠느냐?”

바울은 많은 사람을 세우는 통로로 전면에 드러났지만 바나바는 한 사람을 세우는 선교사로 쓰임 받지 않았더냐?”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상급과 바나바를 향한 하나님의 상급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 과연 차이가 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 세상의 관점, 직선의 관점으로, 크고 많고 화려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오직 하나님 나라의 곡선의 관점으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았으면 좋겠구나.”

지금 너에게 맡긴 영혼이 한 영혼이라도 그 영혼을 바로 세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귀하게 여겼으면 한다.”

그러니 하려하지 않아도, 가진 것이 작아도, 주님 주신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걸 행복으로 알았으면 좋겠구나.”

 

(찬양)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이 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성화)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는 흔히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베드로를 수제자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그렇게 붙인 별칭이죠.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보다도 언제나 먼저 챙긴 것 같고, 언제나 함께 동행토록 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한 까닭이죠.

 

하지만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형제 안드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바라봤기에,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랐죠.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게 된 안드레는 그때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더욱이 안드레의 역할을 거기서만 끝나는 게 아니죠.

안드레는 사람들이 벳세다 벌판에서 날이 저물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어봤죠.

그때 안드레는 한 어린 아이가 가져 온 도시락 안에 든 물고기 두 토막과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나왔던 제자였죠.

 

물론 예수님의 제자는 베드로나 안드레만 있는 게 아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있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은 그렇다고 다른 사도들처럼 대단한 활약을 하며 선교지를 누빈 사도는 아니었죠.

오히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40년가까이 봉양한 인물이죠.

그녀를 자기 어머니처럼 모실 때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온갖 잡다한 일들을 다 섬겼던 요한이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루두루 넓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에 비해 안드레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하기보다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깊이 있는 일을 하도록 부르셨죠.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 한 사람을 세우는 통로로 삼으신 것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을 지닌 어린 아이 한 사람에게 집중토록 한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죠.

 

더욱이 사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처럼 그 당시에 온 사방을 다니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토록 부르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안 사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 그 한 분을 향해 깊이 있게 섬기도록 요한을 부르신 것이었죠.

 

(적용)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울처럼 부르실 수도 있고, 바나바처럼 부르실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베드로처럼, 또 안드레처럼, 그리고 요한처럼 부르셔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성격과 재능을 통해 두루두루 많은 사람과 많은 일들을 맡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성격과 재능을 통해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일을 깊이 있게 맡기신다는 점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붙여주든지간에, 무슨 일을 맡겨주든지 간에,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각자 각자 주님보시기에 귀한 그릇처럼 쓰임받는 것 자체에 자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음성) 그래서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연약한 자예요.”

그러나 제 성품과 특성에 맞는 달란트를 맡겨주신 줄 믿어요.”

제가 할 수 없는 역량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주신 주님.”

내게 주신 한 사람이라도, 내게 주신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깊이 있게 섬기게 해 주시옵소서.”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에게 맞는 몫을 주셨고, 안드레와 요한에게는 각각에게 맞는 역할을 맡겨주신 주님.”

지금 저에게 맡긴 작은 일에 최선을 하며 자족하고 감사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이 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로봇처럼 만들지 않고 각자 저마다의 특성과 성품대로 지으시고 사용하길 원하신 분입니다.

100100색의 색깔을 허락하시고, 저마다 고유한 기능대로 사용하실 원하신 주님입니다.

 

바울은 그 성품과 특성대로 더 넓게 사용토록 하셨고, 바나바는 한 사람을 세우는 깊이 있는 사역을 위해 부르셨죠.

더욱이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도 각각 맡은 역할이 달랐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바울이나 베드로가 제일 크고 화려하고 능력있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나라의 관점은 아니죠.

세상은 직선의 관점 경쟁과 앞서는 관점이지만 하나님나라는 곡선의관점 곧 제 각각의 역할에 맡는 그릇대로 쓰임받는 것에 자족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나라의 관점을 갖고, 지금 내게 붙여준 한 영혼을 깊이 세워나가는 축복의 주인공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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