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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말라기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말1:1-14)

by 권또또 202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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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이제 말라기, 곧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라기’라는 뜻은 ‘나의 메신저’ 곧 ‘나의 사자’ 또는 ‘나의 심부름꾼’이란 의미입니다.

 

말라기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느헤미야 선지자와 그 활동이 겹치는 시점에서 활약한 선지자입니다. 이를테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곧장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던 유다 민족에게 귀환 칙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지는데 스룹바벨 총독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인솔해서 약 49,897명이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오죠. 그들이 먼저 한 일은 무너진 성전의 지대를 놓는 일이었죠. 그런데 성전 지대를 놓는데 성전재건에 대한 방해꾼들이 나타났죠. 북쪽에서 내려 온 산발랏과 도비야와 연합한 이방 족속들이 조직적으로 훼방을 했죠. 그것이 무려 15년 정도 흘러가버리지 않습니까? 그때 나타난 선지자가 나이 70이 넘은 학개 선지자와 30애 초반의 스라갸 선지자였죠. 그들은 성전재건을 독려했고, 또 메시아가 오실 것도 함께 선포했죠. 그런 과정을 거쳐 성전재건 공사가 드디어 B.C.515년에 완공을 하고 모두가 축제와 잔치를 벌입니다.

 

그 무렵에 페르시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그 시절에 크세르크세스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그때 아말렉의 왕족 후손인 하만이 유다 민족을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까? 그때 포로민 가운데 후궁으로 발탁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왕 앞에 나서서 하만의 죄악을 고발하여 하만이 장대 나무에 달려 죽고, 대신에 모든 유다 민족은 구원을 받는데, 그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부림절’이 되죠. 그것이 에스더서에 나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뒤에 이제 에스라 선지자가 지도자가 되어 제2차 포로귀환을 하게 되는데, 그때 약 5,000명의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게 되죠. 그들은 예루살렘성벽과 성읍을 재건하는데, 그 역시 방해꾼들이 있어서 쉬운 것만은 아니었죠. 그래서 세 번째로 포로귀환을 이끈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페르시아의 술맡은 관원이기도 했던 느헤미야 선지자였죠. 그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의 총애를 받아 42,00명을 이끌고 제 3차 포로귀환을 하는데, 그의 주도하에 성벽을 재건하게 되죠.

그렇게 느헤미야는 12년간 자기 임무를 성실히 다하고, 다시금 페르시아로 돌아가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너진 성전도 재건했고, 성벽도 재건했는데, 마지막 하나, 예루살렘 성읍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것이었죠. 바로 그 문제를 끌어안고 다시금 예루살렘 땅을 밟아 그 사명을 완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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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BR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BR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BR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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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12년 처음 사역을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던 그 시점에 본문의 말라기 선지자가 활약을 했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말라기 선지자와 느헤미야 선지자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http://soniclight.com/constable/notes/pdf/malachi.pdf

이른바 제사장들의 나태함(말1:6, 느13:4-9)을 지적하는 것도 그렇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을 지적한 것(말3:7-12, 느13:10-13),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지적한 것(말2:10-16, 느13:23-28)이 그렇습니다. 그만큼 말라기 선지자는 느헤미야 선지자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에스라 선지자와 선포한 내용이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하게 된 원인을 깨닫고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준수하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 바로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죠. 그들이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유는 위로 하나님 외에 온갖 탐욕이라는 우상숭배의 삶을 살았고, 아래로 함께 사는 백성들 사이에 공의로움과 긍휼함을 잃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죠. 그것을 거울삼아 이제는 성전재건도 했으니, 그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도록 하라는 것, 그것이 말라기서의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 거듭나는 길이라는 점이죠.

 

오늘 전반부인 1장 2-5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밝혀주고 있고, 후반부인 6-14절까지는 제사장들의 죄악에 대해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삭을 통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는데, 그 중에 장자의 명분이 에서에게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죠. 그 야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 곧 이스라엘을 사랑했는지, 그 민족과 그 선조들은 확연히 알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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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BR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BR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BR 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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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서가 그 사랑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그리고 업신 여겼고, 그는 들 사람으로서 그 당시에 이방 민족의 풍습과 성적인 타락에 빠져 있던 자였죠. 그에 반해 야곱은 집안에서 어머니를 도우며 살았는데, 집 안에 산다는 게 바로 신약성경의 탕자와는 다른 사람, 곧 하나님의 문화와 풍토를 배우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기꾼 기질이 있는바, 그 습성을 고쳐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20년 가까이 밧단 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온갖 고생들을 다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돌아오는 길목에 환도뼈를 쳐서 그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사는 인생이 될 것을 깨닫게 해 주셨고, 그 이후에 진정한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이름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랑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에서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며 짓밟아 버렸던 것이죠. 온갖 우상숭배와 탐욕의 신을 좇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리고 본문의 후반부에서는 제사장들에 대한 죄악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 7-8절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제사장들이 주님을 아버지처럼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재건한 성전제단 위에 더러운 떡을 드리는 것으로,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병든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만했다는 점이죠. 그걸 세상 총독에게 바칠 때에 그들이 기뻐 받겠느냐고 할 정도죠. 그것을 13절과 14절에서도 하나님을 속이면서 드리는 행위로 질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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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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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는 않는지, 또 제사장들처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하나님을 기만하는 모습은 없었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요 하나님께 다시금 사랑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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