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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행28:16-22)

by 권또또 2023.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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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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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느헤미야서는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내용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다 보면 방해꾼들이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 방해꾼들 덕분에 오히려 더 분명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많습니다.

 

바빌론 포로 당시 남유다의 예루살렘은 북쪽 사마리아에 편입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다면 자신의 영향력이 축소될 게 뻔했기 때문이죠.

 

느헤미야 4장을 보면 산발랏이 암몬 사람 도비야와 함께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내통자들을 포섭해 느헤미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모함했고 아예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그들 앞에 아예 나아가질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절반은 성벽을 쌓게 했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들고 경비를 서게 했죠.

물론 성벽을 쌓는 사람들조차도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만큼 낮에 일을 할 때도 그대로 차게 했고 밤에 잠을 잘 때도 무장한 채 잠을 잤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고 불편했겠습니까?

 

(깨달음)그런데 그렇게 무장하고 사는 삶이 불편하고 고단한 일만 되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무장한 채 일을 하고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면 적들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갑옷과 창과 방패와 활을 들고 경비를 서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적들이 처들어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하루 종일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들고 일한 것이 족쇄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과 고단함이 오히려 그들을 스스로 보호하게 해 주는 은혜의 쇠사슬이었던 것이죠.

 

(적용)우리의 삶도 불편함과 고단함의 연속이지 않겠습니까?

그 불편과 고단함이 경제적인 일일 수 있고 육체적인 일 또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불편함과 고단함이 오히려 우리 인생과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기도할 수 있고 더 관계가 깊어질 수 있는 것 말입니다.

 

2023년 전반기의 삶도 실은 불편함과 고단함의 연속이지 않았겠습니까?

한눈 팔 새 없이 일에 매이고 사람과의 관계에 치이고 경제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에 힘이 부쳤던 것들 말이죠.

하지만 그런 불편과 고단함이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매어있게 하시는 은혜의 사슬이 되게 하셨다는 거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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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성경으로 문화읽기2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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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7일간 로마 외항 보디올에 지낸 바울은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죠.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머물 때 자신들이 사는 로마에까지 로마서라는 믿음의 편지를 써 준 바울을 그토록 고대했기 때문이죠.

그 바울이 지금 로마의 외항 보디올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접한 본토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이틀과 사흘 길을 걸어어 양쪽에서 영접한 것이었죠.

 

실은 그것은 바울이 예루살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

그 말씀을 받들고 지금 로마로 향했지만 바울에게는 로마 황제를 만나는 두려움이 엄습해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바울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로마의 본토 그리스도인들을 두 쪽으로 나눠 환영토록 한 것이었죠.

 

그때 바울을 환영해준 그 사람들과 함께 바울은 압비오 대로를 행해 걸어갔습니다.

본래 압비오 대로는 로마의 개선장군이 개선행진을 벌이는 도로로 유명했죠.

그에 비하면 바울은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미결수의 신분으로 그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울은 실패작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위대한 영적 승리자의 모습으로 행진하게 하신 것이었죠.

 

어떻습니까?

동일한 압비오 거리인데 전쟁에서 승리하는 개선장군이 걸어가면 그 거리에 위대해 보입니까?

바울과 같은 미결수가 그 거리를 걸어가면 왠지 실패작처럼 보입니까?

같은 공간 같은 장소라 해도 누가 그 거거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는 것이죠.

쓰레기가 모이는 장소는 악취가 나지만 같은 장소라도 꽃을 심으면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하게 되죠.

같은 밤문화라도 춤꾼들이 모이는 곳은 환락의 장소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거룩한 곳이 되죠.

개선장군이 압비오 거리를 행진하는 것은 세상의 권세를 드높이는 일이지만 바울과 같이 영적인 주님의 훼페레테스가 걸어가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공간이 되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본문 1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이 드디어 로마 본토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미결수 상태인 바울은 호송한 백부장 율리오는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바울을 인계해야 했죠.

가이샤라에서부터 바울을 호송한 백부장 율리오의 책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로 역사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프라니오스 부루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사망 후에 네로가 황제에 오르도록 곁에서 도와준 인물입니다.

 

일반적으로 황제에게 항소한 미결수는 황제의 근위대 감옥인 프레토리움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근위대장은 바울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근위대장은 바울이 감옥 밖에서 혼자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이샤라에서부터 호송한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을 심문하면서 죄가 없다고 판단한 유대 총독 베스도의 보고서를 읽어본 까닭도 없지 않겠죠.

더욱이 백부장 율리오가 여태껏 바울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그 모든 모습들을 근위대장에게 잘 이야기해 준 까닭이기도 하겠죠.

실은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 황제의 근위대 감옥인 프레토리움에 감금되지 않고 감옥 밖에서 따로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크신 섭리였습니다.

그래야 바울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본문 30절을 보면 바울은 이때부터 2년간 ‘셋집’에서 머물렀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셋집이라고 하면 전셋집이나 월세집을 생각하기가 쉽겠죠.

하지만 바울은 그런 집을 얻을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도움과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헌금(빌4:18)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뜻에서 본다면 바울이 얻은 셋집이란 헛간과 같은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결수 신분인 바울이 혼자 그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군인 한 사람을 시켜서 바울과 함께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바울은 ‘쇠사슬에 매어 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원해)우리말 ‘쇠사슬’로 번역된 헬라어 ‘할뤼시스’(ἅλυσις)인데 진짜 쇠고랑 곧 쇠사슬(chain)입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헛같과 같은 집을 얻어 살 수 잇도록 배려해줬지만 미결수로서 도망칠 것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바울 혼자만 쇠고랑을 차도록 한 게 아니라 군인 한 명과 같이 쇠고랑을 차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결수 바울의 한 쪽 손목과 군인 한 사람의 한쪽 손 목에 같이 쇠고랑을 차도록 해서 도망치지 못하게 한 것이었죠.

형사가 자기 손과 강력범의 손에 수갑을 함께 채우는 것과 같은 형식입니다.

 

(깨달음)그것이 바울에게 얼마나 불편한 일이겠습니까?

그 군인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하고 잠도 같이 자야 하는 형국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 불편한 쇠사슬 덕분에 바울은 로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그 당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그 모든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인간의 재미와 쾌락을 위해 죄수들이 맹수의 밥이 되는 것을 즐겼고, 검투사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도시였죠.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가 로마였고 로마 시민 가운데 성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드물 정도였죠.

 

그토록 죄와 어둠과 타락과 물욕이 강한 곳이 로마인데 바울이라고 어찌 그 유혹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성에 대해 넘어갈 수 있는 죄의 부패성이 남아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죄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 그 로마에서 군인 한 사람과 함께 쇠고랑을 차고 있어서 오히려 그것이 바울이 죄에 걸려 넘어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은혜의 쇠고랑이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모든 면에서 자제력을 상실한 채 어린아이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먹는 것도 즐기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군인 한 명과 함께 쇠고랑을 차게 된 것은 주님께서 그의 자제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주신 은혜의 사슬이었던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불편과 고단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더 굳게 지켜주시는 은혜의 쇠사슬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을 재건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이들이 방해하지 않았더냐?”

그들이 사람들을 동원해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할 때 그들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로 무장하며 경비를 서고 일하며 그 몸으로 잡을 자지 않았더냐?”

그런 모습으로 하루 온종일을 산다는 것, 잠자리까지 그렇게 자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고단한 일인 줄 알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모습을 경비를 서고 일을 했기에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성벽을 재건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 않았더냐?”

바울도 지금 꿈에 그리던 로마 본토에 도착해 헛간과 같은 셋집에서 군인 한 명과 함께 손목에 쇠고랑을 찾지 않았더냐?”

미결수의 신분이기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이 내린 조치이지 않았더냐?”

쇠고랑을 찬 채 그 군인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고단한 일인지 알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쇠고랑 덕분에 자제력을 잃기 쉬운 노년의 바울이 오히려 환락의 도시 로마에서 자기 영혼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2023년 전반기의 삶을 살아오면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간관계속에서 얼마나 불편하고 고단한 일들이 많았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불편함과 고단함이 오히려 네 영혼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은혜의 쇠사슬이지 않았더냐?”

정말로 바쁘고 어려울 때, 감당하기 힘든 일이 밀려들 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께 간구하고 매어달렸다면 그것이 주님께서 베푼 은혜의 사슬이지 않았더냐?”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도 피곤함과 고단함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그 시간시간들이 너의 영혼을 더욱 굳게 붙잡아주시는 은혜의 사슬과 같은 것 말이다.”

 

(찬양)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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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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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제가 하는 목사님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10년간 목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곳 스위스에는 밤 문화가 없다고 합니다.

밤이 되면 모든 음식점도 술집도 다 문을 닫기 때문입니다.

주말이 되면 가족 모두가 등산을 하거나 스키를 타러 간다고 하죠.

그러니 젊은 부부들에게는 스위스가 낭만적일 수 없는 도시지만 그만큼 가정적인 남편과 아내가 된다고 하죠.

 

프랑스 파리는 어떨까요?

프랑스 파리는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요 문화의 도시요 역사와 교육의 도시 그리고 관광도시로 유명하죠.

르부르 박물관을 비롯해 멋진 에펠탑이 관광객들을 만이 끌어 모읍니다.

그러나 파리가 스위스와 다른 것이 있다면 파리에는 밤문화가 넘쳐나고 자유분방한 도시라는 점입니다.

 

그 목사님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직업 때문에 이민을 온 한국인 가정 부부의 자녀들을 지켜봤습니다.

스위스에는 밤 문화가 없기 때문에 그토록 가정적인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의 직장이 제네바에서 프랑스 파리로 바뀌었고 미술가였던 아내도 남편을 따라 두 아이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죠.

 

그런데 파리에서 그토록 예술에 대한 날개를 펴 볼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아내는 가정에 파경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스위스에서는 그토록 가정적이었던 남편이 파리로 이주한 뒤 아내와 두 자식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한참 먼 후배가 파리로 유학을 왔는데 인정많은 아내가 남편의 후배가 파리에 정착할 때까지 자기 집에 묵게 해줬죠.그런데 얼마 뒤에 그 남편이 그 후배와 눈이 맞아 가정을 팽개치고 새살림을 차린 것이었습니다.

그 아내는 그로부터 20년 넘게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에서 그토록 가정적이었던 남편이 왜 프랑스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까?

같은 유럽이지만 프랑스와 스위스의 문화가 그토록 차이가 났던 까닭입니다.

제네바라는 공간과 파리라는 공간이 결코 동일한 유럽의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죠.

 

(깨달음)인간은 이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의 지배 공간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떤 공간에 있든 그 공간의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그 공간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4-15)

 

(적용)한평생 신실하게 살아온 사람의 인생공간과 알코올중독자 혹은 도박꾼으로 살아온 사람의 인생공간이 같을 수가 없죠.

똑같은 공간이라도 불량배들이 모이면 우범지대가 되고 고시생들이 살면 고시촌이 됩니다.

쓰레기를 버리면 쓰레기장이 되지만 꽃을 심으면 꽃동네가 됩니다.

죄수들을 수감하는 공간은 교도소라면 그 건물에서 수도사들이 생활하면 수도원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머문 곳이 우범지대나 쓰레기장이나 교도소가 아니라 고시촌 꽃동네 그리스도 수도원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똑같은 유럽이라 할지라도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파리의 공간이 다르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곳에 머물든지 그곳에 주님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이 세상에 향락과 술문화가 없어서, 그걸 즐기지 못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그것이 답답할지라도 스위스 제네바처럼 오히려 더욱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은혜의 쇠사슬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로마의 헛간에서 병사 한 명과 함께 쇠고랑을 차고 밥을 먹고 일을 보고 잠을 자는 바울이 답답하고 고단하지만 그것이 그의 영혼을 지켜주는 은혜의 쇠사슬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삶이 바쁘고 힘들고 때로는 고단할지라도, 그것이 제 영혼을 더욱 굳게 세워주시는 은혜의 쇠사슬임을 깨닫습니다.”

스위스에는 밤문화가 없어 즐거움도 재미도 유흥도 없지만 오히려 그 삶이 가족을 더욱 튼튼하게 엮어주는 은혜의 사슬인 것처럼 말예요.”

바울이 로마의 헛간에서 병사와 함께 쇠슬을 차고 밥을 먹고 일을 보고 함께 잠을 자는 게 여간 고단하고 피곤한 일이지만 그것이 바울의 영혼을 지켜주신 은혜의 사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을 사는 제 자신이 때론 바쁘고 분부하고 힘에 겨울 때가 많지만 그런 모습으로 주일예배와 수요일밤예배까지 나와 예배드리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제 영혼을 주님 앞에 굳게 세우시는 은혜의 사슬임을 믿습니다.”

“2023년 하반기에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그것으로 인해 주님 앞에 더욱 깨어 있는 영혼이 되게 하신다면 기꺼이 그 은혜의 사슬을 끼고 살게 해 주세요.”

 

(찬양)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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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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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기까지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공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풍요와 번영과 향락과 사치로 인해 우리의 연약한 죄의 부패성이 물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들 앞에 물들지 않도록 때로는 불편함과 고단한 인생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이 성벽을 세울 때 적들의 침략 앞에 대비코자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준비해서 잠까지 자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 본토에 들어가 헛간을 얻어 로마 병사와 함께 쇠사슬에 매인 채로 살아가는 게 힘들고 고단했지만 그것이 그의 영혼을 굳게 지켜주는 모습이 된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기 위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쁘고 분주하고 때로는 더 불편하고 고단함을 겪게 되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앞에 더 굳게 서게 하시는 은혜의 사슬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023년도 하반기에 그런 은혜를 베푸실대 불평하거나 원망하기보다 더욱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는 남은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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