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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책/근간-모세오경의 7가지 질문

모세오경의 7가지 질문-창세기 첫번째 질문

by 권또또 2022.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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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첫째날의 ‘빛’과 일곱째날의 ‘안식’는 어떤 의미가 있나?

먼저 창세기를 기록한 목적을 생각해 볼까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고대 근동 세계에 알리고자 쓴 창문과 같은 것이죠. 출애굽을 경험한 모세와 그와 함께 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 말이죠. 그만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관자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과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말이죠. 그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답게 온전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죠.1)

사람들은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겹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길가메시의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 사건과 노아의 홍수 사건을 대조해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수메르 사람들이 숭배한 신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고향이자 수메르의 도시 국가인 ‘갈대아 우르’나 메소포타미아의 상업도시인 ‘하란’도 그들이 섬긴 달신(月神) 숭배의 중심지였죠. 그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던 일곱 신을 따라 ‘일곱 날짜’ 개념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후대의 로마인들도 일곱 날짜 개념을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2)

그런 점에서 깨닫는 게 있죠. 하나님께서 첫째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한 것은 창조 방법과 그 창조의 순서를 과학적으로 알려주고자 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각각의 날과 그 날들 속에 깃든 신들까지도 통치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 점을 이해하면 ‘6천 년의 젊은 지구론’ 보다는 ‘46억 년의 지구론’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겠죠.3)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과학적인 이론을 제시하거나 논증하고자 함이 아니죠. 고대 근동의 신들을 ‘탈신화’하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말이죠.

물론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셨다는 그 모습은 독특합니다. 첫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발판을 만든 모습이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채우는 모습이죠. 첫째 날은 어둠과 대조되는 빛을, 둘째 날은 물과 물 아래 곧 대기(atmosphere)와 대양(oceans)을, 셋째 날은 마른 땅과 식물을, 각각 세팅하신 모습입니다. 넷째 날부터 이제 그 빛 안에 해와 달과 별을, 다섯째 날은 물 아래의 물고기와 물 위에 새들을, 여섯째 날은 마른 땅 위에 동물과 그것을 다스릴 사람을, 각각 채워 넣는 모습이죠.4)

그런데 첫째 날의 빛은 자연계의 빛일까요? 그런 빛들은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채워 넣으셨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빛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근원적인 빛이자 영적인 빛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요8:12)이라고 말씀해주셨고, 주님의 자녀들을 ‘세상의 빛’(마5:14)이라고 칭하셨죠.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찾아올 때도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행26:13)으로 만나주셨죠. 그만큼 첫째날의 빛은 거짓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빛’(말4:2)이자, 죽음과 대조되는 ‘생명의 빛’(요3:19)입니다. 더욱이 그 빛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는 ‘지혜의 빛’(고후4:6)이죠.5)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기본적인 것들을 세팅하시고 채워넣으신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하다’는 히브리어 ‘샤바트’(שָׁבַת)는 창조 사역을 마무리하고 쉬셨다는 뜻이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마쳤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의 창조 사역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먼저 맞이하게 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 ‘안식’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안식하다’는 히브리어 ‘샤바트’(שָׁבַת)를 풀어보면 ‘십자가’ 또는 ‘언약’으로 ‘돌아가다’는 뜻입니다. ‘샤바트’(שָׁבַת)는 ‘돌아가다’(turn back)는 뜻의 ‘슈브’(שׁוּב)와 ‘십자가’ 또는 ‘언약’을 뜻하는 ‘타브’(ת)의 합성어죠.6) 노아의 ‘방주’도 히브리어로 ‘테바’(תֵּבָה)인데 그 역시 ‘타브’(ת)가 들어가 있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참된 구원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마11:28).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들어가는 길이요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길입니다.

Kumbaya my lord, Kumbaya

Kumbaya my lord, Kumbaya

Kumbaya my lord, Kumbaya

Oh! Lord, Kumbayah

Someone’s praying lord, Kumbaya

Someone’s praying lord, Kumbaya

Someone’s praying lord, Kumbaya

Oh! Lord, Kumbaya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흑인 영가 〈쿰바야〉입니다. 이 노래 가사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의 흑인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죠. 영어 가사인 ‘Come by here’(여기에 임하소서)를 자신들의 귀에 들리는 대로 압축해서 ‘Kumbaya’로 부른 것 말이죠. 우리식으로 말하면 자신들만의 콩글리쉬로 표현한 것입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무력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의 금광을 유럽으로 빼돌렸죠. 노동력이 부족하자 아프리카 흑인들을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렸습니다. 그런 노예 착취는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도 예외이지 않았죠. 그 당시 흑인 노예들은 일주일 내내 고된 일을 했고 주일이면 주인댁 식구들을 모시고 예배당에 갔습니다. 하지만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던 그들은 예배당 안에서 울려퍼지는 백인들의 ‘Come by here, my lord’(주님, 여기에 임하소서)를 자기들 식으로 ‘Kumbaya, my lord’(쿰바야, 나의 주님)하고 부르면서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것이죠.

오늘날에도 그런 사업주와 고용주가 있다면 어떨까요? 자신은 주일날 예배를 드리며 안식하지만 사원들은 일하도록 하는 마트나 사업장의 대표 말이죠. 사업주와 고용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처럼 함께 일하는 분들도 주일이면 쉬도록 하는 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겠죠. 그것이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창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권성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저주인가〉(바른책), 2020, 14쪽.

2)주원준, 〈구약성경과 신들〉(한님성서연구소), 2012.

3)우종학,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새물결플러스), 2017.

4)김경래, 〈구약성경의 맥을 따라서〉(대장간), 1997, 22쪽 참조.

5)펑샹, 〈창세기, 인문의 기원〉(글항아리), 2016, 44쪽 참조.

6)이상준, 〈히브리어 속에 숨겨진 복음〉(버드나무), 2015, 18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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