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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셨느니라(마28:1-6)_2025년 4월 20일 부활주일설교

똑똑이채널 2025. 4. 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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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어느 동네에 게으른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의 이웃부인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왕진가방을 들고 뛰어갔습니다.

환자의 방에 들어간 의사는 조금후 급히 나와서 환자의 남편에게 송곳을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송곳을 줬습니다.

조금후에는 뺀찌를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뺀지도 건네줬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는 다시금 나와서 큰 목소리로 끌과 망치도 주세요,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점점 더 심해져가는 아내의 신음을 듣다 못한 남편은 그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제 아내의 병은 무슨 병이길래 이렇게 심각한 것입니까?”

그러자 의사가 말합니다.

“아직 나도 모르겠소. 왕진 가방이 열려야 알겠는데 이 가방이 열리지 않으니 말이오.”

 

(예화)독일의 화가 스탠버그(Stenberg)는 성 베드로 성당의 위고 신부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그는 부탁 받은 그림을 얼마동안 그리다가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림 값을 너무 적게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을 위해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페피타(Pepita)라고 하는 집시를 모델로 한 세속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아마도 나체화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쉬는 사이에 페피타가 스텐버그가 그리다가 만 십자가 그림을 보고 물었습니다.

“저건 무슨 그림이예요?”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뭣 때문에 그랬어요?”

예수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집시 여인의 질문이 귀찮았지만 스텐버그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려줬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고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그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말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던 페피타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스탠버그가 페피타를 달래며 위로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죽고 만 게 아니라 부활하셨답니다. 그러니까 울음을 그치세요.”

그러자 집시 여인 페피타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까?” 하고는 금방 얼굴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스탠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여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부활하셨다고 할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도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스텐버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만백성을 위해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처음 들은 여인은 부활을 진실로 믿고 저렇게 기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있는가?”

스탠버그는 슬픔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찌기 예수님을 사랑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집시 페피타의 순수한 마음이 스탠버그의 마음속에 충격으로 와 닿으면서 부활에 대한 스탠버그의 믿음도 소용돌이쳤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면서 돈이 적다고 불평하면서 그림 그리기를 내팽개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십자가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스탠버그의 십자가’입니다.

스탠버그는 그림 밑에 ‘내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노라. 너 나를 위하여 무엇 하느냐’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 그림은 수많은 사람에게 감명과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회 역사 속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 남자가 <스탠버그의 십자가>를 유심히 음미하고 있었습니다.

19세의 이 남자는 사회견문을 넓히기 위해 덴마크, 프랑스, 독일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다가 뒤셀로르프의 미술관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시되어 있는 <스텐버그의 십자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특히 그 밑에 쓰여진 제목에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노라. 너 나를 위하여 무엇 하느냐”하는 제목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두드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모라비아 선교 운동의 지도자였던 루드비히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伯爵)이었습니다.

 

(깨달음)예수님의 부활은 집시 여인 페피타를 변화시켰고 그녀를 통해 스탠버그의 믿음이 회복되었고 스탠버그를 통해 진젠도르프 백작의 인생도 완전히 새롭게 된 것입니다.

뭐든 문을 여는 건 어렵지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놀라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법 아닙니까?

부활을 믿는 건 어렵지만 성령님께서 부활을 믿음을 갖게 하시면 그때부터 그 인생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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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 3시 무렵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숨을 거두다’는 표현은 옛날부터 사용한 말입니다.

동네에 누군가 죽었을 경우에 다들 ‘숨을 거두셨다’고 하죠.

그만큼 숨을 거둬들인 주체가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 숨을 불어 넣어주신 주체도 있다는 말이죠.

사람이 자기 스스로 들숨과 날숨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숨을 주신 분도 그 숨을 거둬가신 분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체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의 숨을 거두어 가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숨을 거구실 때 십자가 곁에 있던 막달라 마리아와 많은 여인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 슬퍼했을 것입니다.

불과 닷새 전만 해도 예루살렘의 땅이 흔들릴 정도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분의 권능과 능력이면 기꺼이 로마를 물리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닷새 뒤 힘없이 체포당하고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자 다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난동을 피웠죠.

심지어 주님이 죽으시는 곳에 자신이 죽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를 비롯해 다른 제자들도 줄행랑 치고 말았죠.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많은 여인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힘없이 6시간 만에 죽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유월절 축제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안치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자기 동굴 무덤에 모시려고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했죠.

그러니 그들은 너무 잘 됐다면서 곧바로 시신을 인계했고 로마 군사들의 동석하에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시켰습니다.

물론 빌라도나 유대 장로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이 죽은 후에 살아난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큰 돌을 굴려 동굴 무덤을 막아버렸습니다.

더욱이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하고자 그 동굴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태껏 유대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예수란 자가 이제는 숨을 거뒀고 그 시체가 동굴 무덤에 안치됐고 큰 돌로 무덤 문을 막아버렸고, 로마 군사들은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 훗 첫날이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을 거쳐 토요밤을 지나 주일 새벽 미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른 시각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의 동굴 무덤을 맨 먼저 찾았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온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에만 관점을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이미 지진이 난 상태였고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들이 무덤의 돌문을 열어 제친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인류를 구원코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본문의 일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일입니다.

구약의 열왕기하 13장 21절에도 엘리사의 묘에 사람들의 시체를 던졌을 때 그 시체가 엘리야의 뼈에 닿자 다들 살아난 역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때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형상은 번개 같고 옷은 하얗게 빛나는 천사가 거기에 서 있었고 동굴 무덤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철통같이 지키던 그곳에 지진이 일어났고 동굴 무덤 문이 활짝 열렸고 번개 같고 하얗게 빛나는 천사가 서 있었으니 사시나무 떨 듯이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그때 그 천사가 동굴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말을 합니다.

본문 5-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원해)여기에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게이로’(έγείρω)’입니다.

그 뜻은 ‘일어나다(arise)’는 말입니다.

앉았던 자리나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는 걸 말합니다.

 

사실 2천 년 전에 ‘부활’을 뜻하는 헬라어가 있었습니다.

‘아나스타시스(άνάστασις)’란 단어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 단어는 두 경우에만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부활이 없다고 할 때 그 단어를 썼고 다른 하나는 부활을 신화적인 이야기로만 여길 때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부활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마태나 마가나 누가도 ‘아나스타시스’라는 단어가 아니라 ‘일어나다’란 단어를 쓴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시체 가운데서 다시금 일어나셨다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의 한 복판에 있는 예수님이 그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것이야말로 부활이 신화가 아니라 실제 사건임을 만 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이 동굴 무덤에 있는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다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예수님께서도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여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안겨주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은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으로 연결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가까운 가족은 물론이요 일터의 동료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나누며 살 수 있는 것이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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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월 22일이었습니다.

뉴욕항을 떠난 연합군 병력 수송선 ‘도체스터’호는 904명을 태우고 북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항해 12일 만인 그 해 2월 3일 독일 잠수함이 도체스터호에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어뢰를 맞은 도체스터호는 얼마지 않아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서로 붙잡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와중에 네 명의 군목들은 침착하게 구명조끼를 나눠주며 병사들을 구명정 타는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나누어줄 구명조끼가 없었습니다.

그 때 군목 클라크 폴링 중위가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 믿는가?”

“아니요”

그러자 군목은 자기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구명조끼를 입고 살아서 꼭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네 명의 군목은 모두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병사들에게 주었습니다.

도체스터호에 점점 물이 차올랐습니다.

네 명의 군목들은 서로 팔을 끼고 기울어진 갑판에 서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그 찬송을 부르며 기도한 채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다가기 원합니다

 

그 후 생존한 병사 그래디 클락은 당시의 군목들을 바라본 최후 모습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은 군목들이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들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병사들에 벗어주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 배에 탄 병사 904명 중 605명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병사들은 그 군목들의 희생을 기억하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4명의 군목인 조지 폭스, 알렉산더 구스, 클라크 폴링, 존 와싱턴을 기리는 기념예배당(US Naval Chapel)을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시는 용감하고 희생적인 네 사람의 군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훠 채플린스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아울러 ‘4인의 불멸의 군목들’이라는 기념우표도 발행했습니다.

1992년에는 작곡가 제임스가 그들을 소재로 ‘영원한 빛(The Light Eternal)’이라는 뮤지컬을 제작해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깨달음)왜 그들 네 명의 군목들은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서 병사들에게 나눠 줄 생각을 했겠습니까?

만약 이 세상의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결코 그들은 구명조끼를 벗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군목들은 죽음 이후의 부활이 있음을 믿었기에, 죽음 이후에 천국에 입성할 것을 믿었기에, 기꺼이 구명조끼를 벗어서 병사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기독교가 참된 종교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요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6-20절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6-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체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죽음의 한복판에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기에 우리도 죽음 이후에 부활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가장 유쾌하고 행복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하루 한 장 역대기서 읽고 묵상하기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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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부활주일인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의 부활이 집시 여인 페피타의 인생을 변화시켰고 그녀를 통해 스탠버그의 믿음이 회복되었고 진젠도르프 백작의 인생도 온전히 새롭게 된 것 아니었더냐?”

뭐든 문을 여는 건 어렵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엄청난 기쁨을 누리는 것 아니겠느냐?”

막달라 마리아와 많은 여인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다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엄청난 기쁨을 누린 것 아니었겠느냐?”

네 명의 군목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자신들의 구명조끼조차 병사들에게 나눴던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이 세상 무엇보다도 부활신앙을 소망하며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기쁨을 안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 땅에서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부활이 진정한 기쁨임을 말이다.”

부활의 기쁨이 네 심령 안에 있다면 지금도 지옥문을 향하고 있는 네 핏줄은 물론이고 일터의 동료들에게도 그 기쁨을 나눌 수 있지 않겠느냐?”

주님은 부활의 기쁨을 온 누리에 나누도록 하고자 너에게 부활의 믿음을 온전히 심어주고 계신 것 아니겠느냐?”

 

(찬양)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 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 주시리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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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무덤이 있고 그 봉분이 높고 높지만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그 증거입니다.

세상의 거짓말은 대통령과 부하 장수들까지 짜고쳐도 다 들통나고 말지만 제자들의 부활증거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의 부활증거가 확실한 것은 지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변화되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증거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살아있도록 주님께서는 지금도 역사하고 우리 곁의 누군가의 심령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보다 영원한 부활의 세계 곧 천국의 세계를 바라보며 유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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